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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는 광대가 아니다…음악에 담긴 가치 나눠야"

장병호 기자I 2025.03.24 05:35:00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트럼프 정책 우려에 미국 공연 ''보이콧''
미국의 모습,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
5월 예술의전당서 2년 만에 리사이틀
브람스·수크 등 낭만주의 작품 선보여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미국 정부의 정책으로 전 세계에 번져가는 공포를 보며 미국에서 공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59)는 내년 4월까지 미국에서 예정돼 있던 공연을 모두 취소한다고 발표해 주목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각종 정책을 보고 난 뒤 내린 결정이었다.

◇“음악에는 작곡가의 자유·평등 철학 담겨”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사진=마스트미디어)
테츨라프는 지난 21일 한국 언론과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도 단호했다. 그는 “음악 안에는 자유와 평등처럼 작곡가들이 담고자 한 가치와 철학이 있는데, 이제 미국에선 이런 가치를 더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연주자는 음악만 연주하는 광대가 돼선 안 된다. 음악에 담긴 가치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테츨라프는 음악에 철학을 담은 예로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꼽았다. 프랑스혁명에 기대감이 컸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새로운 시대를 구현해 줄 영웅이라 믿고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이 교향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등 독재적인 모습를 보이고 급기야 황제에 즉위하자 헌정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츨라프는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변화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지금의 미국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감이 든다”고 말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사진=마스트미디어)
다만 테츨라프는 “음악가는 정치인이 아니다”라며 “약자에 대한 배려와 연민의 감정 등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결정이 정치적 신념에 따른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태도에서 비롯됐다는 의미다. 그는 “자선음악회 등 소외 계층을 위한 목적이 있다면 미국에서도 공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테츨라프의 이런 생각은 그의 음악 철학과도 연결된다. 그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그 ‘이야기’는 바로 작곡가가 음악에 담고자 한 가치다. 테츨라프는 “연주자는 작곡가가 음악에 담은 가치와 철학에 충실하게 연주해야 한다”며 “정돈되고 아름다운 연주보다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날 것 그대로의 음악을 들려줄 때 진실한 연주를 보여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자신만의 길 걸어간 작곡가 수크 조명”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사진=마스트미디어)
테츨라프는 콩쿠르 수상 경험 없이 세계적인 연주자로 활동 중인 바이올리니스트다. 베를린 필하모닉, 드레스덴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등 유명 오케스트라의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19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올해의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한국 관객과 여러 차례 만났다.

이번 인터뷰는 오는 5월 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2년 만의 내한 리사이틀을 앞두고 진행했다. 테츨라프는 이번 공연에서 브람스, 시마노프스키, 프랑크, 수크 등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테츨라프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작품들이지만 음악적으로는 다양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며 “특히 수크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작곡가이지만, 많이 조명받지 못해 선곡했다”고 설명했다.

테츨라프는 악기를 대하는 태도도 남다르다.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네리 등 유명한 고(古)악기 대신 현대악기를 사용한다. 현재 쓰는 악기는 독일의 악기 제작자 슈테판 페터 그라이너가 2002년에 만든 바이올린이다. 테츨라프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고악기와 현대악기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며 “지금의 악기는 깊이 있는 소리부터 밝은 소리까지 다양한 음악을 표현할 수 있어서 (나와)잘 맞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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