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배터리가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글로벌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미국의 각종 제재에도 중저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시장을 장악한 데 이어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등까지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K배터리가 중국과 맞설 대책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는 위기설까지 나오고 있다. 업계 안팎에서는 정부가 국가전략산업인 배터리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을 때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데일리는 22일 위기의 K배터리를 진단하기 위해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 황경인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 등 전문가들을 긴급 인터뷰했다.
“中, 정부 차원서 배터리 투자 올인”
중국의 배터리 굴기 현상은 뚜렷한 추세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CATL(38.3%)과 중국 BYD(16.7%)는 각각 1위와 2위에 올랐다. CALB (3.9%), 고션(3.5%)까지 더하면 중국 배터리 점유율이 62.4%에 달했다. LG에너지솔루션(10.7%), SK온(4.7%), 삼성SDI(3.3%) 등 K배터리 3사의 경우 18.7%에 그쳤다. 배터리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배터리 음극재 출하량 톱10은 모두 중국 업체들이었다. 한국은 포스코퓨처엠 정도만 11위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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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중국 배터리 굴기의 근원적인 힘은 무엇일까.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첫손에 꼽힌다. 김필수 교수는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보조금을 주면서 ‘올인’을 하고 있다”며 “투입 비용을 정부가 지원해주니 기업들은 팔기만 하면 되는 구조”라고 했다. 이호근 교수는 “중국은 막대한 자금력과 인력을 등에 업고 개발 기간을 단축하면서 기술력으로 압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LFP 배터리는 한때 싸구려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소비자들이 중저가형 전기차를 선호하면서 이에 탑재되는 LFP 수요가 높아지고 있어서다. 황경인 부연구위원은 “배터리 경쟁 양상이 성능에서 가격 경쟁으로 전환됐다”고 했다. 니켈·코발트·망간(NCM) 기반 삼원계 배터리에 주력하다 뒤늦게 LFP 배터리에 뛰어든 한국의 점유율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이유다. NCM과 LFP는 생산 공정이 달라, 한국 기업들이 여러 기술들을 보완해 LFP 양산에 나선다고 해도 중국과 가격 싸움에서 이기기 쉽지 않다.
이뿐만 아니다. 박철완 교수는 “(꿈의 배터리라고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는 한국은 사실상 시작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중국이 한참 앞서 있다”고 했다.
“韓, 정부 주도 컨트롤타워 세울 때”
더 주목할 점은 중국 배터리가 중국 내수를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업체인 중국 CATL이 지난 20일 홍콩 증시에 상장하며 ‘대박’을 터뜨린 것은 유럽 시장 공략과 무관하지 않다. 황경인 부연구위원은 “미중 갈등으로 인해 중국 배터리가 미국에 진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CATL은 상장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유럽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호근 교수는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배터리 공장들의 평균 가동률은 85% 수준인데, 중국 내부 배터리 공장들의 가동률은 45%가 채 안 된다”며 “중국 회사들이 내수 포화 이후 해외에 진출하면 한국 기업들은 더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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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같은 위기를 타개할 만한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지금은 차입금이나 유상증자를 통해 돈을 끌어모아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가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보조금을 축소할 경우 K배터리는 벼랑 끝에 몰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박철완 교수는 “빠른 실적 회복은 어려울 것”이라며 “(정부와 기업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 모든 걸 원점에서 다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배터리를 국가전략산업으로 계속 키울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면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이호근 교수는 “배터리가 국가 전체와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정부가 주도적으로 컨트롤타워를 세워 움직여야 한다”며 “규제 완화, 인프라 구축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김필수 교수는 “정부와 지자체가 기업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현재 국회에 발의돼 있는 직접 환급제 등 지원책을 현실화해 달라는 기대감이 있다. 다만 여야 의원들이 낸 관련 법안들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고, 정부 역시 특정 산업에 대한 보조금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