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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사고인가 공작인가…보이지 않는 전쟁터 '해저 케이블'

이소현 기자I 2025.01.30 06:30:00

발트해·대만해협서 ''하이브리드'' 공격
통신·전력 차단…국가 안보·경제 위협
군사 충돌 없이도 상대국 인프라 무력화
"러시아·중국 ''회색지대'' 협력 강화 중"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전 세계적으로 해저 케이블에 대한 공격과 훼손 사건이 증가하면서 국가 안보 및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해저 케이블은 글로벌 인터넷 트래픽의 95% 이상을 담당하며, 금융 거래, 군사 통신, 데이터 센터 운영 등 핵심 인프라를 지원하는 필수 시설이다. 그러나 해저라는 특성상 관리와 감시가 어렵고 공격을 받더라도 즉각적인 대응이 힘들어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되고 있다.

화물선 베스헨호가 스웨덴 당국의 조사를 받기 위해 27일(현지시간) 스웨덴 칼스크로나 항구 외곽에 정박해 있다.(사진=AFP)


실제 최근 발트해에서는 해저 케이블에 대한 물리적 공격과 의심스러운 사고가 다수 발생했다.

26일(현지시간) 라트비아와 스웨덴 사이 발트해 해저에 설치된 광섬유 통신 케이블이 손상됐다. BBC 등에 따르면 스웨덴 당국은 발트해를 따라 라트비아로 연결되는 데이터 케이블을 훼손한 혐의를 받는 선박을 압류했다. 문제의 선박 ‘베스헨’호은 몰타 국적의 화물선으로, 현재 스웨덴 칼스크로나 항구 외곽에 정박 중이다. 검찰은 초기 조사 결과 사보타주(고의적 파괴 행위)의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스웨덴 경찰, 군, 해안경비대가 합동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했다. 스웨덴과 라트비아 양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는 근처 해역에 대한 순찰과 검문을 강화했다.

작년 12월엔 유조선이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사이 발트해 해저케이블을 훼손했다. 이 유조선에 러시아어 자판이 있는 노트북 여러대, 청취·녹음 장비 등 스파이 장비가 실려 있었다고 영국 해운전문지 로이즈리스트는 보도했다.

작년 11월엔 핀란드~독일, 리투아니아~스웨덴 고틀란드섬을 연결하는 두 개의 해저 인터넷 케이블이 24시간 내에 절단됐다. 유럽 당국은 중국 선박 ‘이펑 3호’가 고의로 닻을 끌어 케이블을 절단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스웨덴, 리투아니아, 독일, 핀란드 간의 통신에 지장이 발생했다. 2023년 10월에도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잇는 해저 가스관과 통신 케이블이 파손됐다. 서방에서는 이들 사건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사보타주를 벌인 것으로 의심한다.

발트해뿐 아니라 대만 해협에서도 해저 통신 케이블이 손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3일 발생한 통신 케이블 파손에 대해 대만 당국은 중국 소유의 화물선 ‘순싱 39호’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건은 대만과 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발생하여 추가적인 우려를 낳고 있다.

2023년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만짐토티 해변에서 작업자들이 2아프리카 해저 케이블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해저 케이블은 이처럼 국가 간 대립의 주요 전장이 되고 있다. 군사적 충돌 없이도 상대국의 인프라를 무력화하는 회색지대 전술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미 스탠퍼드대 국가안보 혁신센터 산하 해양 투명성 프로젝트인 씨라이트(SeaLight)의 설립자이자 미 공군에서 35년간 복무한 레이먼드 파월 전 대령은 외교전문지 디플로맷과 인터뷰에서 최근 발트해와 대만 해협 등에서 발생한 해저 케이블 절단 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하이브리드 전쟁’이라고 분석했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군사적 충돌 없이도 상대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전략으로 사이버 공격과 경제 압박, 정보전, 비정규전 등과 함께 해저 케이블 공격이 새로운 하이브리드 전술로 떠오르고 있다는 얘기다.

파월 전 대령은 최근 대만 해협에서 벌어진 해저 케이블 절단 사건과 관련해 “중국은 대만이 해상 교역과 통신에 의존하는 섬 국가라는 약점을 이용하면서, 탄자니아나 카메룬 같은 편의치적국(수수료를 받고 선박을 등록하는 데 필요한 국적을 빌려주는 국가) 소속으로 등록된 상업용 선박을 앞세워 직접적인 책임을 회피하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월 전 대령은 작년 11월 발트해에서 발생한 중국 선박의 해저 케이블 절단 사건에 대해서는 “최근 나타나는 양상은 러시아와 중국 간의 회색지대 협력이 점점 강화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양국 간 동맹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시사한다”며 “중국은 러시아의 유럽 내 군사적 대결을 은밀히 지원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책임 회피의 여지를 더욱 넓힐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만 근해에서 러시아 선적 선박이 의심스러운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정황도 포착된 바 있다”고 언급했다.

2024년 12월 28일 핀란드 앞바다에서 찍은 사진에는 쿡 제도 국기를 달고 운항하는 유조선 이글 S호(왼쪽)가 예인선 우코호 옆에 있다.(사진=AFP)


해저 케이블 훼손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라 필요하면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가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 메시지’라는 지적도 나온다. 파월 전 대령은 “더 이상 국제적 비난을 크게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더욱 대담한 방식으로 회색지대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며 “과거에도 국제적 비난이 오래가지 않으며 실질적인 비용도 많지 않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깨달았고 점진적으로 공격성을 높여가며, 일정 수준 이하의 도발은 일상적인 사건으로 인식되도록 만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가운데 해저 케이블 공격을 받는 국가들은 더 이상 악의적인 행위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파월 전 대령은 “해저 케이블은 극도로 길고, 감시가 어렵고, 결정적으로 적대 세력의 공격에 취약하다”며 “이를 강화하는 작업이 필수적이 될 것이며, 각국 정부는 보다 정교한 해저 감시 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하고 하나의 케이블이 절단되더라도 전체 경제가 마비되지 않도록 백업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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