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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자의 과도한 업무 시간과 노동 강도를 줄임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자는 취지로 2018년 7월에 도입됐다. 실제로 우리나라 근로시간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길었다.
그런데 주 52시간제가 모든 업종에 획일적으로 적용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기업이 제품생산을 할 때는 시간을 기초로 일한다. 시간을 정해서 제품을 생산하는데 이 방법을 R&D 분야에 그대로 적용을 해 문제가 있다. 연구원들은 R&D를 집중적으로 하다 가도 시간이 되면 퇴근을 해야 한다. 오랫동안 집중력 있게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제도하에서는 더는 연구활동을 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주 52시간제가 고착화하면서 연구원들의 업무 마인드가 ‘목표 지향적’에서 ‘시간 지향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업무를 맡으면, 언제까지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목표여서 그 다음 날 조금 늦게 출근하더라도 늦게까지 일을 하거나 밤샘 일을 해서 끝내 놓았다. 하지만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에는 시간이 목표가 되면서 특정 시간까지 일하고 멈추게 됐다. 퇴근하고 다음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이로 인해 비효율이 생기고 연구력 저하로 이어진다.
필자는 기업에서 반도체 칩을 설계하거나 제품개발을 했던 경험이 있다. 전체 중 차별화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건 전체의 약 30%,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사양이 제대로 구현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약 70%다. 소위 테스트를 통해 구현 여부를 보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되고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과정을 거친다. 특히 양산, 사업화 과정에서 많은 시간투자가 있어야 한다. 많은 고생을 하고 땀을 흘리는 단계를 거친다. 주 52시간제에선 이 과정이 연속적이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지게 된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과정은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연구개발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대만이나 다른 경쟁국들이 안 하는 규제를 왜 해야 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 기업의 경쟁상대인 미국 엔비디아, 대만 TSMC 연구원은 필요 시 밤샘 연구를 하지만 우리 기업 연구원은 자진해서 연구하고 싶어도 현행법상 초과근무를 할 수 없다. 특별 연장 근로 제도가 있으나 대부분 기업에 돌발 상황이 상시 발생하는데, 인원과 사업 내용을 고용노동부 장관 승인까지 사전에 받아야 하므로 활용이 어렵다.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특별법 등을 통해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지금 한국 반도체의 위기 상황이다. 메모리반도체의 초격차 경쟁력이 약화했고, 시스템반도체는 여전히 뒤처져 있다. 핵심 연구원은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집중해서 일하고, 원할 때 쉰다. 연구원들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핵심 인력은 대체 불가한 경우가 많아 추가 인력을 투입하는 방식만으로는 개발 진도를 나갈 수도 없다.
‘연구개발(R&D)인력의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 조항은 일률적으로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의 문제점을 완화하자는 것이고,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에 역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외로 할 경우라도 그에 상응한 보상을 해 삶의 질 향상을 꾀하면 될 것이다. 삼성 측 설명에 의하면, 반도체 부문 전체 직원 중 R&D인력만 해당하므로 주 52시간 예외 직원은 9% 불과한 수준이다.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연구원에게 환경과 기회를 주고, R&D의 인재들이 마음껏 열심히 일할 수 있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주 52시간에 갇혀서는 안 된다. 한국 반도체 미래를 위한 정치권의 빠르고 현명한 결정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