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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에이징(Well-Aging)에 대한 담론은 활발하지만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빈약하다. 삶의 마지막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나답게 죽음을 준비하는 문화는 아직 미약하다. ‘좋은 죽음’은 개인의 철학과 선택의 문제이자 초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다뤄야 할 공적 주제가 됐다.
일본은 이미 이른바 ‘다사(多死) 사회’에 진입했다. 일본 총무성(2024년 인구동태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약 160만 명이 사망하고 있다. 문제는 이 죽음이 ‘개인의 문제’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병원에서의 죽음이 일반적이던 시대를 지나 돌봄시설과 자택 등 다양한 공간에서 삶을 마무리하게 되면서 사회적 부담과 정책 공백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고독사, 무연고 사망 등 사망 이후 방치되는 사례가 늘어나며 죽음은 이제 지역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과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한국 역시 조만간 다사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고령자 1인 가구가 증가하고 자녀와 동거하지 않는 ‘나 홀로 죽음’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생애 말기 삶에 대한 고민과 준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됐다. 국가 차원의 웰다잉 정책, 생애 말기 돌봄 체계, 공공 장례와 고독사 예방 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호스피스·완화의료 제도 같은 웰다잉 정책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지만 여전히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과 심리적 저항으로 실제 활용은 미미하다. 무엇보다도 제도가 삶의 현장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죽음을 둘러싼 일상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철학의 목적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죽음을 두려움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더 충실히 살아가기 위한 거울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더 나은 생의 방식을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다. 그리고 그것은 제도 이전에 가정과 일상에서의 대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일이 가족끼리도 어렵고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도 꺼려지는 현실은 죽음이 여전히 개인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부부가, 형제가 삶의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평소 친밀한 관계에서도 죽음을 금기어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내 아버지는 생전 화장이 아닌 매장을 원했다. 장례 당일 다른 가족은 화장하길 원했지만 함께 살며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돌본 나는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지키려 애썼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 사람다움’을 지켜주는 일,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곧 존엄한 이별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삶을 존중하는 방식의 완성이다.
죽음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다가올 현실이다. 이야기할 수 있어야 준비할 수 있고 준비할 수 있어야 더 나은 마지막을 설계할 수 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마주하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구성원의 삶을 품격 있게 만드는 건강한 사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학교 교육이나 지역 커뮤니티, 직장 내에서도 죽음에 대한 성찰과 준비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죽음을 미루거나 숨기기보다 더 나은 이별을 위한 하나의 ‘삶의 기술’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필요하다.
“죽음을 말할 수 있어야 삶이 깊어진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그 너머의 존엄을 응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의 무게와 삶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