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혁신의 이면에는 창조적 파괴가 따른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되면 카드사들의 결제 중개 수익은 급감하고 은행들의 외환송금 수수료 수익도 대폭 줄어들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수십만 명의 카드, 페이먼트게이트웨이, 외환, 금융업 종사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1865년 영국의 도로기관차법, 일명 ‘붉은 깃발 법률’은 혁신 억제 규제의 대표적 사례다. 자동차를 시속 4마일로 제한하고 차량 앞에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을 배치하도록 한 이 법률은 표면적으로는 안전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마차 산업 보호를 위한 혁신 억제책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30년간 지속한 규제로 영국은 자동차 산업에서 독일과 프랑스에 뒤처졌고 산업혁명 주도국에서 후발주자로 전락했다. 기존 산업 보호라는 단기적 목표는 달성했지만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는 치명적 손실이 있었다. 물론 급속한 기술 변화에 대한 사회적 적응 시간을 제공한 측면도 있었지만 보호주의적 접근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한 것이 문제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규제 상황은 1865년 영국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새로운 금융기술의 등장, 기존 산업의 위기감, 일자리 감소 우려, 규제로 해결하려는 정치적 압력까지 모든 것이 데자뷔다.
핵심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가 제정하려는 법률이 영국의 붉은 깃발 법률과 같은 혁신 억제책이 될 것인가, 아니면 건전한 혁신을 촉진하는 제도적 기반이 될 것인가.
현재 논의되는 법안들에는 우려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과도한 발행 요건, 복잡한 승인 절차, 높은 자본금 요구 등은 진입 장벽을 높여 혁신을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기존 금융기관들에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은 사실상 규제 포획(regulatory capture)에 해당한다.
반면 소비자 보호와 금융안정성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는 필요하다. 준비금 관리의 투명성, 발행기관의 건전성 규제, 자금세탁 방지 등은 건전한 시장 형성을 위한 필수 요소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존 금융 종사자들에 대한 배려가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카드사, 페이먼트게이트웨이, 은행 외환업무, 송금업체 종사자들은 모두 기술 변화의 직접적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 대한 고민 없이는 건전한 혁신도, 사회적 합의도 불가능하다.
정부와 국회는 다음과 같은 정책적 배려를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 첫째, 기존 금융업 종사자들을 위한 대규모 재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디지털 금융, 블록체인 기술, 핀테크 운영 등 새로운 분야로의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둘째, 5~10년간의 충분한 전환 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편해야 한다. 셋째, 기존 금융기관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규제 샌드박스와 같은 실험적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문제는 이 변화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다. 영국이 붉은 깃발 법률로 자동차 산업에서 뒤처진 교훈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급격한 변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도 최소화해야 한다.
성공적인 제도 변화의 핵심은 ‘균형’에 있다. 혁신을 촉진하되 안정성을 해치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되 기존 이해관계자들을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입법은 단순한 금융 규제법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디지털 경제 시대에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대한 기로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고 모든 이해관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때다.
■추원식 변호사 △서울대 법과대학 △제36회 사법시험 합격 △사업연수원 26기 △(전)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미국 뉴욕주 변호사(2005년) △(전)법무법인 광장 파트너 변호사 △(현)법무법인 YK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