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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현지시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제출한 ‘근대 산업혁명 유산 관련 후속조치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9월 위원회가 유산 등재 후속조치에 대해 관련국과 대화하고 약속 이행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결정을 채택하면서 일본에 추가 조치에 대한 진전사항을 제출할 것을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일본은 2017·2019·2022년 세 차례 이행경과보고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했지만 ‘강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등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2021년 제44차 회의에서 일본 측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이례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공개된 보고서에도 한국은 물론 세계유산위원회가 거듭 일본 측에 약속한 조치를 이행하라고 강조한 사항들을 일본은 지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제 노역을 정당화 하려는 꼼수를 부린 셈이다.
먼저 한국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전시할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전시물이 아닌 한국어판 증언 자료집을 서가에 비치하는 수준에 그쳤다. 또 ‘강제노역’의 전체 역사에 대한 설명을 포함해달라 요청했지만, 일본은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관련 설명 도입, 해설사 역량 강화 훈련, 도쿄 센터 개관일 확대, 광산노동자 봉급·복지 비교연구 지원 등 조치로 대신했다.
2023년 9월 도쿄 센터에 설치한 한일 강제병합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취지의 전시물을 즉각 철거해달라는 요청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2015년 군함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아래서 강제로 노역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있었다’고 발언했던 일본 측이 이후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보고서를 통해 사실을 왜곡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 12월 제출한 보고서에는 ‘강제’(forced)라는 단어를 빼고 ‘지원’(support)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강제성을 희석했고, 2019년 보고서 때도 구체적 후속 조치 내용을 담지 않았다.
2020년 도쿄 신주쿠에서 개관한 메이지 산업유산 정보센터가 강제노역 현장과 거리가 먼 센터 위치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전시물로 논란을 빚은 가운데 같은 해 제출된 해석전략 이행 보고서에도 구체적인 조치 내용은 없었다. 2022년 보고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노동 조건이 같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디지털 장치 추가, 직원 훈련 등 한국인 강제동원과 무관하거나 한국인의 노동환경과 생활상이 일본인에 비해 차별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한 자료들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일본이 잇따라 이행사항을 지키지 않는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외교부는 이재웅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과 일본 스스로 약속한 후속 조치들이 충실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 대변인은 이어 “정부는 일본이 국제사회에 스스로 약속한 바에 따라 관련 후속 조치를 조속히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재차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에 성실히 (우리와) 대화에 임할 것을 촉구할 것”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앞으로 한일 양자뿐 아니라 유네스코 틀 내에서도 일본의 약속 불이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유네스코에서 일본의 후속 조치가 미흡하다고 거듭 지적할수록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신뢰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만 불이행 사항들에 대해 실제로 제재를 가하거나 이행을 강제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정부가 유네스코 측에 군함도 등의 유산 등재 취소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는 방안도 있으나, 유네스코 규정상 유산이 훼손됐거나 제대로 보전되지 않는 등의 ‘중대한 변경’ 사유가 있어야만 등재 취소가 이뤄질 뿐 ‘권고 사항 불이행’에 따른 등재가 번복된 전례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지난해 11월 일본의 무성의로 파행된 ‘사도광산 추도식’에 이어 일본의 역사 문제 인식에 대한 의구심은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협력 강화를 모색하던 한일관계에 악재가 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