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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평창동 갤러리세줄 내 카페에서 만난 탤런트 고두심(74)씨는 인터뷰를 위한 사진 촬영 직전 처음 보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이같이 말하며 인사를 건넸다. 배우가 직접 현장을 정리하는 모습이 놀라웠지만 그에게는 꽤 익숙한 듯 보였다.
실제로 제주에서 드라마를 촬영할 때의 일화는 드라마 업계에서 유명하다. 시끄럽다며 항의하는 취객에게 한걸음에 달려가 “삼촌 금방 끝내고 갈게! 술은 그만 잡숴”라며 현장을 수습했다. 53년차 배우의 관록일까?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 선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행동이 먼저 나가요. 촌사람 그대로지요. 그냥 나오는 거라 방법이 없어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선 일의 경중을 마다하지 않고 행동부터 옮긴 일화는 또 있다. 이번에는 5만원권 위인 교체사건이다. 2000년대 중반 5만권 화폐 발행 가능성이 커지며 화폐의 새로운 모델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무작정 한국은행 총재를 찾아갔다. 약속도 하지 않은 방문이었지만 총재는 흔쾌히 시간을 내줬다. “돈은 벌어서 김만덕 할머니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 하지 않나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화폐에 넣을 인물로 김만덕 할머니가 적격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정부표준영정이 있느냐?’라고 묻더군요.”
정부표준영정은 한국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민족으로 추앙받는 선현들의 영정 난립을 막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정한 영정이다. 표준영정 제작에는 전문가들이 참여하는데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이 없어 제작에 난항을 겪는 것이 대다수다. “그때 처음 알았어요. 표준영정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는 표준영정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부탁을 했고 그렇게 김만덕 할머니의 표준영정 제작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영정 모습이 너무나 자신을 닮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요청했고 현재의 표준영정이 만들어졌다.
“김만덕 할머니 모습을 찾아주고 싶어서 한 일인데 제가 드러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미지 수정을 요청했어요. 현재의 모습은 제주 여성들의 동글 납작한 모습과 닮아 있어요. 이런 모습이 김만덕 할머니에게서 나온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일찌감치 5만원권 화폐의 인물로 신사임당이 정해진 상태였지만 한번 시작한 일을 멈출 고두심이 아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정은 김만덕 기념관 동상으로도 제작됐다. 그리고 2021년에는 제주 지역화폐인 ‘탐나는전’ 고액권에 담겼다. 다소 무모하지만 해내고야 마는 뚝심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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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MBC 공채 5기로 데뷔했다. 제주여중·고 시절부터 고전무용을 했는데 그때부터 끼가 있었던 거 같다.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배우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MBC 연기자 모집에 지원해 1등으로 합격했다. 3차 시험 경쟁률이 5000대 1 정도 됐던 거 같다. 그때 내 번호가 1513번.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 앞에도 뒤에도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런데 면접시험을 보면서 나는 될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에는 합격자 발표를 라디오에서 했는데 그때 내 이름이 1등으로 나왔다. 그때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데뷔 초 연기 생활은 어땠나.
△1등 할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던 때였다. 그래도 1등이니 신데렐라가 되어서 금방 주인공 역을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합격 후 교육하며 선배들이 담배, 커피 심부름을 시키더라. 돈도 주지 않고 시키는데 당시에 사회 물을 조금 먹었다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다시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다시 배우로 돌아갔나.
△사회 경험이 있어 겁 없이 부딪혔던 거 같다. 그런데 어느 날 MBC에서 전화가 왔다. 1등으로 뽑아놨는데 왜 안 나오느냔 거였다. 그래서 그동안 겪은 일들을 다 얘기했더니 일단 다시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배우를 시작하게 됐다. 첫 드라마는 일일연속극 ‘갈대’였다. 김혜자씨는 남편의 옛날 애인으로 저는 본부인 역을 맡았다. 삼각관계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신선하게 바라봤던 거 같다.
-김만덕재단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김만덕 할머니는 조선 후기 제주에서 태어나 신분의 벽을 넘어 거상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는 1795년 제주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평생 모은 재산과 객주를 모두 내어 1400여석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주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이런 선행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금강산 유람을 허락받는 등 큰 칭송을 받았다. 그녀의 삶은 오늘날 ‘나눔과 상생’이라는 제주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나도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김만덕 할머니의 삶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속에서 김만덕 할머니 역도 여러 번 맡았는데.
△맨 처음이 1976년 일열연속사극 ‘정화’였다. 김만덕 할머니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극이었다. 결혼 후 부산에서 시어머니와 지내고 있을 때 주인공 캐스팅 연락을 받고 올라가니 감독이 살이 쪄서 안 되겠다며 탈락시켰다. 그리고 나에겐 김만덕 할머니의 권번시절 친구역을 맡겼다. 주인공에서 한번에 단역으로 바뀐 거다. 카메라가 주인공만 비추는 데 속이 끓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주인공에게 일이 생기며 배역이 교체됐다. 당시 연출이 부르며 “이런 게 자기 운이야. 가서 열심히 하고 와”라며 김만덕 할머니 역을 맡겼다. 집에 와서 문을 걸어잠그고 혼자 거울을 보며 연습했다. 25살에 흰 칠을 하고 김만덕 할머니 역할을 하는데 제대로 됐겠나. 욕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목소리가 중저음이라 시청자들이 좋게 봐준 것 같다. 이후 드라마 ‘거상 김만덕’을 통해 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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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후에 제주에 김만덕 할머니 탑이 세워졌다. 굉장히 나와 인연이 깊다.
- 특별한 인연이다. 김만덕 할머니처럼 나눔도 많이 했는데.
△학교 다닐 때 장학금을 받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웠다. 난 공부보다 예체능에 능해 장학금 수해 대상은 못 됐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1990년대 모교인 제주여중·고에 1억원씩 2번 장학금을 기탁했다. 그때 기탁한 기금이 ‘두심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예체능에 소질이 있는 학생 양성을 위해 쓰이고 있다. 정기적으로 학생들에게 편지도 받고 있다. 한번은 제주 목욕탕을 갔는데 멀리서 누가 반갑게 뛰어오더라. 두심장학금을 받은 학생이었다. 자기소개를 하며 반가워 했는데 목욕탕이어서 사진은 못 찍어줬다.(웃음)
- 이후 천섬쌓기, 만섬쌓기 운동도 했는데.
△김만덕의 뜻을 되살리자는 취지로 제주에서 ‘나눔 쌀 천섬쌓기’ 운동을 했다. 그런데 당초 목표 1000섬보다 227섬이 더 모인 1227섬(10만 2160㎏)이 쌓였다. 제주시민 10여만명이 동참해 모은 것이다. 공동모금회를 통해 제주도의 복지시설, 소외층에 전달했다. 이후에 서울에서 만섬을 모아보자고 시작했다. 만섬쌓기도 한 달 만에 이뤘다. 어려운 이웃에 전달돼 의미 있게 쓰였다. 앞으로도 받은 사랑을 사회에 돌려주는 삶을 이어가고 싶다.
-‘김만덕 국제상’ 제정에도 힘쓰고 있는데.
△김만덕 대상을 국제상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포럼을 열고 키노트 스피치도 했다. 제주만의 상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알리는 상이 되길 바란다. 관이 아닌 민간 주도로 추진해, 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상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김만덕 할머니의 정신이 오늘날 어떻게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이 빠르게 변하지만 나눔과 상생, 공동체를 위한 정신은 잊혀선 안 된다. 제주 여성의 독립적인 삶, 척박한 환경을 일구는 강인함이 오늘날에도 필요하다.
-연기대상 최다 수상자다. 배우로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전원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2년간 양촌리 맏며느리로 살며 ‘국민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사랑의 굴레’와 ‘꽃보다 아름다워’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사랑의 굴레’에는 조연으로 출연했음에도 그 해 최고상인 KBS 연기대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당시에 노주현씨 부인으로서 끊임없이 남편을 의심하는 역할이었다. 유행어 “잘 났어 정말”이 그때 탄생했다. 당시에 의부증 환자 역할을 제대로 소화했다며 정신과 선생님들이 상을 주겠다고 했다. 상을 받으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상을 받으러는 안 갔다.(웃음)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는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려 큰딸 앞에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가슴에 빨간약을 바르는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품마다 저만의 진심을 담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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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미국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배우의 길을 택했을 때 걱정도 많았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대학에 진학했는데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고 해서 놀랐다. 그런데 자기도 하다 보니 ‘평생 어머니를 뛰어넘지 못할 거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경제학과로 바꿔서 졸업했다. 한국에 와서 컨설턴트 회사에 2년 다니더니 ‘자신의 길이 아닌 거 같다’며 ‘배우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한 번은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 나는 허준의 어머니로, 아들은 허준의 친구역을 맡아 잠깐 마주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내가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아들이 못할까 봐. 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분장실로 돌아가는데 후배 견미리가 청심환을 들고 있다가 입에 쏙 넣어줬다. 내가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을 봤다며 ‘그 마음 안다’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오히려 아들은 ‘엄마랑 하니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괜찮았다’고 말하더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는 모자지간으로 나왔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인 아들의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모습이 있었다. 당시에 ‘이게 실제상황이라면?’이라는 마음으로 했다. 이렇게 횟수가 쌓여가니 아들이 ‘지금은 오히려 떨린다’고 한다. 이제는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건강 관리 비법은.
△평창동에 살며 북한산 청담샘까지 산책을 자주 한다. 맨손체조도 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이 건강의 비결이다. 산이 무료로 개방되면서 관리가 어려워진 점은 아쉽지만 자연 속에서 걷는 시간이 나에게 큰 힘이 된다.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이 있다면.
△인생은 설계대로 되지 않는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맡은 역할을 성실히 해내는 것이 나의 숙제다. 김만덕 할머니의 정신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도 계속 힘쓰고 싶다. 배우로서도 늘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겠다.
■고두심 이사 △1951년 출생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 △김만덕기념사업회 대표이사 △현 서울시 문화예술 분야 명예시장 △현 김만덕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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