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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도 싹은 트고 새는 난다 [국현열화]<1>

오현주 기자I 2025.03.14 07:40:00

△절망에서 희망을 본 '류경채'
광복 후 황폐한 땅서 움트는 생명 포착
사실적 풍경화 대신 청·적 색채의 향연
'폐림지 근방'으로 국전 최고상 수상해
광복·전쟁 겪으며 혼란한 한국미술사
풍성하고 튼튼하게 재건한 공신 꼽혀

류경채의 ‘폐림지 근방’(1949). 스물아홉 살이던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이다. 당시 주류던 사실적인 풍경 묘사를 벗겨내는 시도로 한국화단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길을 텄다.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하는 ‘MMCA 상설전 한국미술 1960∼1990’ 중에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을 모은 주제방에 걸린다. 캔버스에 유화물감, 94×12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오는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없이 펼쳐낼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전시에 한발 앞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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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어느덧 3월이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차가운 땅을 뚫고 연둣빛 싹을 틔워내는 생명을 볼 때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란 표현이 결코 식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1949년. 광복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은 서울의 어느 황폐한 땅에서 기어이 생명을 발견한 화가가 있다. 류경채(1920∼1995)다. 스물아홉 살이던 류경채는 신혼집부터 근무지까지 오가는 길목에 자리한 빈 땅에 자꾸만 눈이 갔다. 지금은 서울 성동구 왕십리 한양대 건물 부지로 꽤 번화한 동네이지만, 그때는 나무들이 마구 베여 나간 뒤 버려진 척박한 땅이었다. 류경채는 폐허로 변한 야산의 모습이 마치 일제강점기에 박해받던 우리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픈 마음을 담아 ‘폐림지 근방’(1949)을 그렸다.

작품에서 슬픈 기운이 느껴진다면, 화가의 심정을 알아챈 거다. 하지만 류경채가 그린 폐림지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나무들은 그 쓸쓸한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용을 쓰고 있는 듯 보인다. 바로 류경채가 목격한 그대로다. 그는 봄이 되면서 흙 속에 숨어 있던 많은 기운이 분출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고, 그 길로 따스해지는 폐림지 흙의 온도, 나뭇가지가 뿜어내는 리듬감, 생명의 활력을 화폭에 불어넣었다.

류경채가 광복 후 처음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49, 국전)에 ‘폐림지 근방’을 출품했을 때, 심사위원 중에는 이 그림을 ‘위험한 것’으로 지목한 사람도 있었다. 그간 정답처럼 여겨지던 사실적인 풍경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하나였던 화가 이인성(1912∼1950)이 “현실에서 요구하는 감정을 표현한 소박한 작품이자 색조가 건강한 좋은 작품”이라는 평으로 옹호했고, 결국 최고상인 대통령상까지 수상하게 됐다.

이인성의 평가대로 이 작품은 색채가 압권이다. 진하고 깊은 청색 하늘부터 화면을 과감히 가르는 짙은 붉은 면과 희끗희끗하고 얼룩덜룩한 땅, 거기에 더해 옥빛, 에메랄드빛, 푸른빛을 오가는 나뭇잎까지. 1949년이란 연도를 다시 확인하게 할 만큼 세련된 색채의 조화다.

◇하얀 커튼 속 푸른 그림자 관찰…유년부터 남달랐던 미술 재능

아름다운 색채가 아름다운 생활 덕분은 아니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류경채는 가난했다. 스스로 기술했듯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녹슨 레일처럼 누워 가난과 담배를 씹어물던 시절”이었다. 이토록 영롱한 색채는 폐림지에서 생명을 찾아내는 작가의 눈, 다른 말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역시 떡잎부터 알아보는 것일까. 류경채의 미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발현된 것 같다. 고향 전라남도 여수에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선생님이 정물화를 가르치던 중 정물 뒤에 드리운 커튼이 무슨 색인지 물었다.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흰색이라 외쳤다. 뒤에 조용히 앉아 있던 류경채만이 아니라고, 커튼에는 푸른빛이 서려 있다고 답했다. 흰색의 커튼에 햇빛이 만들어내는 푸른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관찰했던 것이다. 그날 선생님은 류경채에게 “너는 꼭 화가가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류경채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이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안목은 정확했다. 류경채는 1938년 전주사범학교 2학년 재학 중 전국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선만학생미전’에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였고, 1940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배를 그린 작품 ‘선’으로 입선하며 이를 입증했다. 화가가 되고 싶던 모든 조선인이 출품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공모전이었다. 원작은 남아 있지 않지만 “자유스러운 필치와 정열을 가지고 자연을 대했다”는 평으로 미뤄 보아 ‘폐림지 근방’에서 보인 느낌과 비슷한 풍경화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류경채의 또 다른 작품 ‘비둘기 치는 소녀들’(1959)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 남의 집 2층에 세들어 살며 그렸던 그림이다. 그 무렵 류경채는 목공소를 하는 부인의 친구에게 큰 테이블 하나를 얻어 그 위에 유리를 깔고 팔레트로 사용했다. 방보다 더 큰 테이블팔레트라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그림을 그렸고, 희곡작가였던 그의 부인은 같은 테이블 밑에 조리기구를 두고 살림을 했다. 물감 살 돈이 없어 벽을 칠할 때 쓰는 석회가루에 풀 역할을 하는 아교를 섞고 옷 염색용 안료를 풀어 물감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정식 물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칠한 지 한 주만 지나도 변색하기 일쑤였다. 궁핍했던 시절에 아이 하나를 잃기도 했지만, 그는 이 시기를 가장 진정성 있게 그림을 그렸던 때로 꼽았다.

류경채의 ‘비둘기 치는 소녀들’(1959).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란 일생의 테마를 따뜻한 색조에 녹여내며 구상시대를 마무리한 작품이다. 이후 화풍은 형태를 소멸하는 서정적인 추상으로 옮겨갔다.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하는 ‘MMCA 상설전 한국미술 1900∼1960’에 걸린다. 캔버스에 유화물감, 97×130.5㎝.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시절을 반영해서인지 작품은 화려하지 않다. 흰색과 살구색을 주조로 사용하면서 밑칠이 보일 듯 말 듯 나이프나 못과 같은 뾰족한 기구로 화면을 긁었다. 물감 사이로 드러난 바닥이 마치 상처를 입은 듯하다. 그래도 궁상맞아 보이진 않는다.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 얼룩덜룩 재미있게 칠한 색, 요리조리 변형시킨 형태 덕분에 현실의 누추함이 가려진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봐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류경채가 찾아낸 그 시절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말년엔 구체적 형상 사라진 추상화의 세계로

말년에 류경채는 구체적인 형상이 모두 사라진 완전추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1959년 어느 날 서울 풍경을 그리던 중 도저히 한눈에 서울 전체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이 나오지 않아 몽땅 지워버렸단다. 다 비우고 나니 오히려 원하는 그림이 되더라고 했고, 이것이 추상화로의 변환점이 됐다. 이후로 류경채의 화면에서는 알아볼 수 있던 나무나 비둘기 같은 대상이 사라졌다. 다만 색채가 남았다. 한국의 풍경에서 뽑아올린, 세련되고 조화로운 류경채만의 색채였다.

미술사에 기록된 많은 미술가가 기존 질서를 깨부수는 데 열을 올렸던 것과 달리 류경채는 주로 제도권 안에서 활동했다. 제1회 국전에서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이후 4년 연달아 특선을 수상했고,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 등으로 국전에 적극 참여했다. 교수로도 평생 일했다. 경기공립사범학교(지금의 서울교육대학, 1946∼1949), 이화여대(1955∼1961)를 거쳐 서울대 미술대학(1961∼1986)에서 정년할 때까지 후학을 길러냈다. 40년이 넘는 세월이다. 말년에는 여러 외부 일 때문에 “그림 그릴 시간이 적어져 걱정”이라고 한탄할 만큼 한국 미술계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지키는 데 열심이었다. 인생에서 딱히 드라마틱한 일화도 없다. 평생 직장과 집을 오가며 일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런 류경채의 삶에서 우리가 여전히 미술가에게 기대하는 어떤 반항성이나 일탈적인 면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술계의 시스템을 지키는 것은 이를 부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특히 광복·전쟁 등을 겪으며 체제가 무너진 한국에서는 미술계를 재건하고 튼튼히 하는 일이 꼭 필요했다. 류경채는 제도권 안에 있으면서도 그 보수성에 조금씩 균열을 내며 우리 미술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기존의 사실적인 풍경화와는 다른 ‘폐림지 근방’을 국전에 출품해 최고상을 탄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미술사학자들의 평가대로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던 그의 작품은 이후 국전이 추상화까지 포용하게 하는 초석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류경채는 분명 우리가 더욱 애정을 기울여 기억해야 할 미술가다.

봄이야말로 색의 교향악이라고 말했던 류경채. 올봄에는 그의 작품을 기억하며 발밑으로 움터 나오는 별별 빛깔을 만끽하면 어떨까.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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