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지부진한 수사 상황 속에 출국금지 대상에 올랐다. 디자이너로서의 외부 활동은 어려워졌다. 주무대였던 파리가 아닌 서울의 한 웨딩홀에서 약식으로 자신의 쇼를 진행해야할 정도로 초라해졌다. 이 마저도 주변 지인의 도움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다.
생계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 정치권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친문계(친 문재인) 의원실도 냉담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본거지인 파리에서조차 그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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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김 여사의 단골 디자이너로 알려진 양해일 디자이너를 만났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에 남다른 패션 감각을 보인 그는 ‘누가봐도 디자이너’였다. 불어 억양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투에서 프랑스 디자이너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1980년대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서 패션 유학을 했던 양 디자이너는 파리에 정착해 디자이너 생활을 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영부인 옷을 디자인한 회사에 다니는 등 파리에서도 성공적으로 경력을 쌓아 갔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부인 손명순 여사의 옷을 디자인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국내 유통대기업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임기 후에는 국내 한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5년여 한국 생활을 한 후 다시 파리로 돌아가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이어갔다.
그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때는 2012년이었다. 자신의 이름 ‘해일’에서 딴 ‘HEILL’이라는 브랜드를 시작했고 서울 이태원에 매장을 냈다. 파리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던 디자이너답게 최고급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2017년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김정숙 여사의 옷을 디자인했다. 민화를 응용한 그의 디자인은 호평 받았다. 양 디자이너는 “한국에서 이를 주제로 브랜드를 만들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이걸 김정숙 여사도 너무 좋아했다. 코드가 맞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여사도 양 디자이너의 옷을 통해 한국의 디자인과 패션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게 있었다. 그가 처음 영부인의 옷을 디자인했던 1990년대와 2010년대 후반의 정치현실은 너무나 달랐다는 점이다. 정치 세력 간 극단적인 대립 속에 영부인은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됐다. 옷값에 대한 의혹도 나왔다. 청와대 특수활동비로 옷값을 냈다는 것인데 타깃은 김 여사였다. 주요한 주변인이었던 양 디자이너는 조사 대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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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디자이너는 옷값이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정했다. 파리 현지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경력으로 봤을 때 그가 납품했던 옷값은 ‘싼 편’에 들었다.
게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영부인의 옷 선택은 공개 입찰로 진행됐다. 그의 지인은 “옷값을 부풀려서 비자금을 조성하려고 했다는데, 옷값 하나하나만 따졌을 때는 말도 안된다”고 부연했다.
정치적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했다. 그는 “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일 뿐”이라며 “고객이 누구든 상관 없이 옷을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던 거의 모든 일을 멈춰야 했다. 사무실 문까지 닫게 되면서 생계 곤란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의 지인은 그를 두고 “버림 받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정치적으로 옭아매려고 하는 정치 세력은 물론 그를 대변해야 할 민주당도 양 디자이너의 일에는 아직 나서고 있지 않다. 검찰이 문 전 대통령을 기소했을 때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친문계 의원들의 의원실 관계자들도 상황 파악에 머무르는 정도였다.
지난해 출국 금지가 되면서 양 디자이너의 파리 경력은 중단됐다. 영부인 3명의 옷을 디자인했던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의 해외 활동은 그렇게 막히게 됐다. 이재명 후보가 강조했던 K이니셔티브를 수십년 전 프랑스에서 실천했던 양해일의 뒷모습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양해일 디자이너는 수사와 정치적 논란 속에서 활동 기반을 잃었지만, 그의 패션에 대한 열정과 철학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하며, 정치적 오해가 아닌 디자인 그 자체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조기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양해일 디자이너 역시 ‘K-패션’의 원조로서 다시 한 번 비상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지인 또한 “한국 전통과 현대 감각을 조화롭게 풀어낸 해일(HEILL) 브랜드가 국내는 물론 세계 무대에서도 다시금 주목받는 날이 오기를, 많은 이들이 응원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