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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 기업은 대체로 세 가지 방향성에 맞춰 동남아에 진출했다.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섬유 임가공 분야, 부동산 개발 붐에 다른 개발 투자, 이들에 자금을 공급하는 은행 등 금융업 진출이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법조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 같은 진출 방식은 동남아를 ‘시장’이라기보다는 생산기지나 투자처로 보는 접근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현지 업계 관계자들은 이제 동남아가 단순한 투자처라기보다, 한국 스타트업에게 매우 전략적인 ‘브릿지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인구 규모, 제조 기반, 소득 대비 높은 소비 성향이 있는 시장이어서다. 그리고 한국 제품에 친숙하기 때문에 특히 이커머스, 리테일, 소비자 솔루션 분야에서 한국 스타트업이 이상적 고객 프로필(ICP)을 재현하기에 적합한 시장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최근 동남아에서 영화, 드라마, 예능 등 콘텐츠 시장이 성장하며 K콘텐츠 지식재산권(IP)을 기반으로 제작한 현지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K뷰티·라이프스타일·F&B 브랜드들 인기를 끌며 현지 진출 시 지분투자를 받는 경우 역시 생겨나고 있다. 예컨대 필리핀 증시에 상장된 대형 식품 업체 졸리비푸즈는 지난해 국내 저가 커피 브랜드 컴포즈커피를 인수했다.
다만 국내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현지에서 한국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떨어져 진출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K컬처의 배경에 있는 시장 논리, 제조 인프라, 기술 경쟁력 등에 대한 현지 이해도는 얕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계 관계자들은 동남아 지역에 진출하려면 현지 파트너와 협업이 필수적인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과거 한국 기업은 합작투자를 통한 사업 성공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신뢰를 담보로 한 현지 네트워크 구축이나 현지화 전략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글로벌 VC 한 관계자는 “LP나 현지 VC와의 공동 투자를 추진할 때 ‘왜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해야 하는지’를 맥락 있게 설명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관계자들은 동남아 해외투자 진출이 아웃바운드 중심에서 인바운드 투자유치를 함께 고려하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VC 업계 관계자들은 현지에서 직접 투자 기회를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하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통했던 투자 논리가 이곳에서 잘 적용되지 않아서다. 이유는 동남아가 단일 시장이 아니라, 국가별로 규제·문화·창업자 상까지 다른 ‘분절된 시장’이라는데 있다.
권혁현 500 글로벌 심사역은 동남아 시장이 ‘책상 위 리서치’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권 심사역은 “진짜 기회는 슈퍼앱이나 핀테크처럼 익숙한 모델이 아니라, 전통 산업과 기술이 결합된 ‘딥 로컬라이제이션(Deep Localization)’형 스타트업에서 나온다”며 “문제는 이런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포지셔닝이나 IR 역량이 부족해 외국 VC 입장에서는 투자 기회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래서 직접 발로 뛰며 현지 전문가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기회를 발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