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068h
device:
close_button
X

수양과 안평 형제의 핏빛 비극…허망한 농담 같구나

장병호 기자I 2025.03.18 14:09:43

국립창극단 신작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
계유정난 27년 뒤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
함축적 은유 담은 글, 감각적 연출로 풀어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근본 없는 어느 떠돌이의 농담일 뿐이오. 허황하고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농담.”

국립창극단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장)
지난 1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창극단 신작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의 한 장면. 형 수양의 권력욕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동생 안평이 자신의 비극을 마치 제3자의 이야기인양 나직이 읊조리다 웃음을 짓는다. 폐허와 같은 적막한 무대 위, 안평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이 보는 이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든다.

‘보허자’는 한 편의 시(詩)와 같은 작품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비극인 계유정난을 중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명확한 기승전결의 드라마는 등장하지 않는다. 계유정난의 비극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이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 헛된 욕망과 그 욕망으로 스러져간 평범한 이들의 삶을 조명한다.

국립창극단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장)
작품은 계유정난 비극이 벌어진 지 27년 뒤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안평의 딸이자 유일한 혈육이었던 무심(민은경 분), 안평을 모시던 화가 안견(유태평양 분), 안평의 애첩이었던 대어향(김미진 분)이 오래전 안평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가 보관된 절 대자암으로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이들의 여정에 이름 모를 나그네(안평, 김준수 분), 그리고 나그네의 눈에만 보이는 혼령(수양, 이광복 분)이 함께 한다.

우리 말맛을 살리는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극작가 배삼식이 극본을 썼다. ‘트로이의 여인들’, ‘리어’ 등 서양 비극을 한국적 한(恨)을 담은 창극으로 풀어냈던 배 작가는 이번엔 아름다운 시어로 구성된 가사로 인물의 비극적 감정을 표현한다. ‘리어’를 같이 작업한 한승석 음악감독이 작창과 작곡을, 그리고 소리꾼 장서윤과 함께 작곡을 맡아 깊이 있는 음악을 선사한다.

함축적인 가사와 대사가 많은 작품이다.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대신 조명과 인물의 움직임 등 감각적인 연출이 인물들의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첫 창극 연출에 도전한 연출가 김정의 결과물이다. 특히 수양을 향한 조명의 변화가 인상적이다. 작품의 후반부 ‘몽유도원도’가 무대 위에 펼쳐지는 장면 또한 말 그대로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전한다.

국립창극단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의 한 장면. (사진=국립극장)
한 번만 봐서는 작품이 담은 모든 주제를 이해하기는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대신 그만큼 여러 번 곱씹어보고 싶은 매력이 있다. 배 작가는 “우리의 존재는 무겁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은 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멀리 있어서 불가능한,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꿈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소개했다. 공연은 오는 20일까지.

배너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Not Authoriz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