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막대한 정치 자금을 대주면서 ‘킹메이커’ 자리를 꿰찼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20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카타르경제포럼(QEF) 화상 연설에 참석해 “보수 성향 후보들을 많이 도왔지만, 앞으론 그럴 이유를 못 느낀다.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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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마가’(MAGA·트럼프 지지) 후보들을 위해 돈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머스크의 지원을 기대했던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입장에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머스크는 지난해 7월 트럼프 지지를 선언한 후 최소 2억 5000만달러를 선거 자금으로 지원했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며 정부 개혁에 앞장섰다.
그러나 최근 위스콘신주 대법관 선거에서 자신이 2500만 달러를 지원한 공화당측 후보가 패배한 뒤 입장을 바꿨다. 이 선거는 민주당이 트럼프 행정부와 머스크의 DOGE 정책을 쟁점화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선거 당시 미 전역의 테슬라 매장 앞에서는 머스크 반대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민심이 악화한 상태였다.
위스콘신주 대법관 선거 패배 직후 머스크는 “정치에서 한 발 물러나 테슬라 경영에 집중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외신들은 머스크가 이미 ‘특별 공무원’ 관련법에 따라 오는 30일 DOGE 수장에서 물러날 예정이었다고 지적했다.
거의 1년 동안 진행된 머스크의 ‘정치 도박’은 “명성과 신뢰는 잃었지만, 사업적으론 챙길 것을 다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테슬라·뉴럴링크·스페이스X·xAI 등 머스크가 운영하는 기업들과 관련된 40건 이상의 조사 및 법적 조치가 사실상 중단 또는 종료됐다. 이를 통해 그가 20억달러 이상의 경제적 이익을 봤다고 민주당은 추산했다. 트럼프에게 쓴 2억 5000만달러의 8배에 달하는 규모다.
로켓·위성·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규제 완화도 머스크에게 이익을 안겼다. 동물 실험·학살 혐의로 조사를 받던 뉴럴링크는 별다른 제재 없이 세 번째 인체 실험을 진행했고, 엑스(X)는 디지털 결제, 개인정보 등의 규제 완화로 신사업 확장에 유리한 환경을 확보했다. 스페이스X는 정부 계약에서, 테슬라는 전기차 인프라 투자에서 직접적 수혜를 입었다.
특히 미 교통부는 지난달 운전대와 페달이 없는 자율주행차의 도로주행을 허용했는데, 이는 테슬라의 핵심 사업인 자율주행차 상용화에 힘을 실어준 조치다. 이와 관련, 머스크는 이날 CNBC와의 인터뷰에서 6월 말까지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자율주행 로보택시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머스크의 평판은 추락했다. 한때 진보와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DOGE를 통해 대규모 구조조정, 부처 통·폐합, 해외원조·복지사업 축소 등을 밀어붙였다. 초기엔 “정부의 낭비 근절”이라는 명분에 공감을 얻었으나, 오랜 기간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무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해고하며 민심을 잃었다.
사업적으로도 이익만 챙긴 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테슬라는 중국 부품 조달에 차질을 빚었고, 전기차 보조금 축소 추진으로 시장도 위축됐다. 테슬라의 1분기 매출과 이익은 각각 20%, 70% 감소했고, 주가는 약 47% 폭락했다. 이에 테슬라 주주들은 본업을 소홀히 한다며 비판했고,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을 벌였다.
DOGE 역시 목표와 달리 실제 연방예산 절감액은 1700억 달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JP모건 등은 “절감액 상당 부분이 계약 만료, 일회성 자산 매각 등 예정된 사업 종료를 성과로 부풀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재무부 자료에서도 DOGE 출범 이후 연방예산 총지출은 줄지 않았다.
그럼에도 머스크는 이날 인터뷰에서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할 때 CEO의 정치적 견해를 얼마나 신경 쓰겠느냐”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5년 후에도 테슬라 CEO 자리에 있을 것”이라며 테슬라 경영에 대한 의지도 나타냈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머스크의 행보에 불만을 품은 테슬라 이사회가 후임자를 모색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머스크는 또 테슬라와 AI기업 xAI가 엔비디아와 AMD로부터 더 많은 칩을 구매할 계획이라고 예고했다. xAI는 미국 테네시주 외곽에 최대 100만 개 GPU(그래픽처리장치)를 탑재한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을 추진 중이라고도 밝혔다. 머스크는 DOGE를 통해 연방정부 데이터에 대한 접근 권한을 확보, 다른 AI 기업들은 접근하지 못하는 정보를 xAI의 AI 모델 학습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 언론들은 “머스크의 정치 도박과 DOGE는 미 사회에 정부 개혁의 필요성과 민간 주도 효율성의 한계라는 두 가지 교훈을 남기며, 논란 속에 막을 내리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