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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이데일리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아이켄그린 교수는 “한국처럼 소규모 개방경제는 민간 스테이블 코인보다 CBDC를 우선시해야 한다”며 공공 통화 시스템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강조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세계적인 통화·금융 시스템 전문가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자문위원,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그의 연구는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의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정치권과 통화 당국 간에 디지털 화폐 주도권을 둘러싼 미묘한 온도 차가 감지된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국회는 민간 주체가 발행하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 등 관련 입법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행은 통화정책 일관성과 시스템 리스크 관리를 이유로 CBDC 중심의 공공주도 모델을 선호하고 있다.
이런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아이켄그린 교수는 우선순위의 명확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병행 추진하는 정책도 펼 수 있지만 우선 순위는 명확히 CBDC에 있어야 한다”며 “한국처럼 외환시장과 국제자본 흐름에 민감한 개방경제는 공공주도 디지털 화폐가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원화로 표시된 스테이블코인은 통화정책과의 충돌 가능성은 작지만 여전히 공공 주도의 CBDC보다 제도적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우려는 남는다”며 “특히 달러 기반 스테이블 코인은 중앙은행의 통화 통제력을 직접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즈 기고문에서도 미국이 추진 중인 ‘Genius Act(지니어스 액트)’를 강하게 비판했다. 지니어스 액트는 민간 기업들이 자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으로 월마트나 아마존 같은 기업이 ‘기업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그는 이 법안에 대해 “21세기판 와일드웨스트다”며 “이는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의 혼란을 되풀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규제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에도 선을 그었다. “머니마켓펀드(MMF)가 ‘1달러’를 유지하지 못해 패닉을 불러온 2008년 금융위기,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채권 손실로 지급불능 사태가 발생한 2023년 등은 규제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규제만으로 민간 디지털 화폐의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사적으로 반복돼온 착각이다”고 지적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민간 스테이블 코인이 지급결제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 담보 자산의 불안정성, 유동성 위험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스테이블 코인의 기본 구조는 안정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자산운용 방식이나 유동성 구조가 취약한 경우가 많다”며 “위기 시 대규모 인출이 발생하면 금융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그는 “스테이블 코인이 단순한 기술이 아닌 금융시스템 전반의 구조와 연결돼 있어 도입에 앞서 구조적 안정성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테이블코인, 구조적으로 불안…CBDC가 더 안전”
반면 CBDC에 대해서는 “지속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그는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고 관리함으로써 통화의 공공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민간 주체에 의한 화폐 남발이나 시장 불안을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CBDC는 통화정책과 호환하고 뱅크런 리스크를 줄이면서 화폐의 단일성을 보장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일한 결제 기반과 국가가 보장하는 화폐라는 점에서 CBDC는 신뢰와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디지털 통화의 유력한 모델”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통화질서 재편과 관련해 스테이블 코인이 주요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나타냈다. 그는 “현재 통화 시스템의 분절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요인은 미국 달러에 대한 국제적 신뢰 약화다”며 “스테이블 코인은 이 흐름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미국 금융 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불신이 생기면 탈(脫) 달러화가 더 빨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만약 스테이블 코인 자체가 시스템적 불안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면 이는 단지 기술의 실패가 아닌 달러 체계에 대한 국제적 불신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아이켄그린 교수는 “스테이블 코인은 기술적으로는 블록체인 기반의 진보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신뢰 기반 금융시스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수단이다”며 “자산 기반, 유동성 대응력, 시장 내 신뢰구조 등에서 매우 까다로운 설계와 감독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도 민간 화폐 실험은 존재했지만 결국 대중의 신뢰와 정책적 지속 가능성 부족으로 실패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서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에 100% 준비금 보유 또는 은행 면허 취득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이켄그린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그건 큰 전제(if)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역사는 그런 규제가 실제로 효과적으로 작동한 사례가 드물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과도한 낙관론에 경계심을 보였다. 그는 “규제 프레임이 아무리 정교해도, 위기 상황에서 투자자 심리를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