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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대출 제한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앞서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지난 29일 국무회의에서 “중대재해와 관련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를 명확히 반영할 방안을 강구하고자 한다”며 “중대재해로 이슈가 된 기업에 대해 대출을 제한하는 내용을 여신 업무 내규에 담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같은 발언은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은 주가가 폭락할 정도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한 맥락에서 나왔다.
김 위원장의 보고 이후 정책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실제 대출 제한 조치를 추진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며 금융권은 술렁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강경한 기조와 김 위원장의 공개 발언을 고려하면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신규 대출과 보증 제한 등 더 수위 높은 조치를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시 대출을 끊는 조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사고 이력이 있는 기업에 대해 보증심사를 강화하거나 모니터링을 대폭 늘리는 등 간접 제재를 현실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현재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IBK기업은행 등 주요 정책금융기관은 중대재해 여부를 여신심사 항목으로 직접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ESG 기준 중 ‘사회(S)’ 항목에서 산업안전 리스크를 포괄적으로 평가 요소에 포함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ESG 리스크 평가를 통해 기업의 안전관리 체계나 사회적 책임 수준을 들여다보긴 하지만 중대재해 발생을 이유로 자동으로 대출을 축소하거나 거절하는 구조는 아니다”고 말했다. IBK기업은행 측도 “안전 관련 인증 도입 여부 등은 참고 요소일 수는 있지만 이를 근거로 제재하는 기준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정책금융기관은 공통으로 ESG 관련 금융이 그간 인센티브 중심으로 설계돼왔다고 했다. 친환경 설비를 도입한 기업에 우대금리를 적용하거나 안전경영 우수기업에 더 큰 한도를 부여하는 식의 ‘지원 중심’ 운영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금융위는 앞으로 정책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중대재해 리스크를 ESG 평가 항목에 더 정교하게 반영하는 방안을 우선 검토할 방침이다. 이미 일부 시중은행과 정책금융기관은 안전보건 경영 인증(ISO 45001) 보유 여부나 안전관리 전담조직 여부 등을 평가 기준에 반영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금리나 대출 한도를 차등 적용하는 방식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ESG 중 환경(E)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앞으로는 사회(S) 요소도 강화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안전관리 체계의 비중이 커질 수 있다”며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을 일률적으로 제재하자는 것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 역량이 부족한 기업에 대해 평판과 재무위험을 함께 고려하겠다는 취지다”고 말했다.
금융권 “대출 차단, 신용평가 형평성 어긋나”
금융권 관계자들은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대출 제한과 같은 방식은 실효성이 낮고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입을 모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출은 기본적으로 미래의 채무 상환 능력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인데 단일한 사회적 이슈로 대출을 차단하는 것은 신용평가의 중립성과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은행 관계자도 “산업재해가 발생한 중소기업이 안전설비를 개선하려고 해도 대출이 막히면 오히려 개선 여력이 사라질 수 있다”며 “징벌보다 개선 유도와 지원 중심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금융이 중대재해 문제에 개입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제재 방식은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대재해를 반복하면 ESG 등급이 하락하고 대출심사에서 평판 리스크로 반영된다”며 “국책은행이 직접 나서서 징벌적 패널티를 부과하는 것은 사실상 이중제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대재해 자체를 제재의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안전관리 투자 유도와 정교한 평가 시스템을 통해 간접 유도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도 “정책금융기관이 신규 대출을 제한한다 하더라도 기존 대출을 회수하기는 어렵고 실효성 또한 크지 않다”며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이 타 금융기관으로 자금조달을 전환할 수도 있어 정책금융만으로 문제를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모든 중대재해를 동일한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서 교수는 “안전설비에 투자할 여력조차 없는 영세기업과 충분한 재정이 있음에도 관리 소홀로 재해를 일으킨 기업은 구분해야 한다”며 “모든 기업을 획일적으로 제재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지원이 필요한 기업에는 오히려 금융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강 교수 역시 “사고 이후 제재보다는 예방 중심의 투자에 특화금융을 제공하는 방식이 더 실질적이며 현실적이다”며 “예방 중심의 ESG 평가 강화가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