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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한 날은 2004년 8월 9일이었다. 이날 오후 강원 영월읍 농민회 사무실에서는 한 영농조합법인 간사였던 B(사망 당시 41세)씨가 목과 배 등을 수십차례 찔린 채 발견됐다. 같은 달 6일부터 10일까지 영월로 가족 휴가를 왔던 A씨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A씨는 휴가 하루 전날인 5일 미리 영월을 방문해 B씨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당시 가족들과 미사리 계곡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9일 오후 2시부터 3시 45분 사이 농민회 사무실로 향했으며 컴퓨터 작업 중이던 B씨를 둔기와 흉기로 살해했다.
이후 B씨의 동료였던 농민회원이 살해 현장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A씨는 곧바로 잡히지 않았다. 현장에는 범행 도구와 지문이 없는 상태였고 용의자로 지목됐던 A씨는 사건 발생 시각 가족들과 휴가를 보냈다고 알리바이를 댔기 때문이다. 실제로 A씨는 당일 촬영했던 물놀이 사진을 경찰에 제출하며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현장에 남은 흔적은 샌들 족적뿐이었지만 결정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으며 사건은 장기미제로 남게 됐다.
2014년 재수사 착수, 2020년 범인 족적 확인
A씨 피살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강원경찰청 전담수사팀이 2014년 재수사에 착수한 뒤였다. 당시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7년에 걸쳐 족적 재감정을 반복했고 2020년 6월 A씨의 족적 특징점 17개가 범인의 것과 99.9%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회신을 받게 됐다.
경찰은 2020년 11월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지만 족적의 증명력과 직접 증거가 부족하다는 등 이유로 영장은 청구되지 않았다. 다만 검찰은 3년 7개월간 족적에 대한 추가 감정을 진행하고 혈흔 및 DNA 분석, 휴대전화 통신 내역 검토, 목격자 재조사를 통해 걸쳐 증거를 확보했다.
수사 과정에서는 A씨가 범행한 배경에 치정 문제가 얽혀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A씨는 2003년 12월께부터 영월에 거주하던 여성 C씨와 교제했는데 C씨가 이듬해 6월부터 B씨와 사귀고 ‘B씨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범행을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A씨가 알리바이 증거로 낸 사진의 촬영 시각은 임의 조작할 수 있었으며 당시 A씨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은 계곡이 아닌 장소에서 수신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A씨가 수사기관에 샌들을 제출하며 바꿔치기를 시도하거나 돌려받은 샌들을 곧장 폐기했던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法 “과학수사로 유죄 인정”…무기징역 선고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된 A씨는 “물놀이 장소인 영월 미사리 계곡을 벗어나지 않았을뿐더러 범행 현장에 간 적도 없다”며 “수사기관이 증거로 제시한 범행 현장의 족적 역시 피고인의 샌들과 유사할 뿐 피고인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은 “이 사건 범인으로 몰려 가정과 삶이 모두 파탄 나 억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은 “발자국 등 여러 증거가 피고인을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다. 치정에 얽힌 범행으로 비난의 여지가 큰데도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며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는 “여러 정황과 간접 증거를 통해 범행 현장에 샌들 족적을 남긴 사람이 범인으로 강하게 추정되는데 피고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몰래 샌들을 신고 범행했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고 우연일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어 “20년간 미제로 남은 살인 사건이 족적 등에 대한 과학적 수사와 치밀한 재판 심리를 통해 유죄가 인정된다”며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한 쟁점 사안에 대해 다각적 분석을 거쳐 무죄 추정을 깨트릴 만큼 합리적 의심도 없다”고 판시했다.
이에 불복한 A씨 측은 항소했고 지난 11일 열린 2심 재판에서 “국과수 감정관은 맨눈으로 족적과 샌들 간 일치성을 판단했지만 대검찰청 소속 감정관은 두 감정물 간 일치한다는 확신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견을 밝혔다”며 추가 감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2심 재판부는 감정 촉탁 대상을 넓혀 감정인을 선정하기로 했다.
A씨에 대한 다음 재판은 내달 23일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