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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지난해 기준 1인당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 경제의 산업화는 외식 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20년 전만 해도 식탁에서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선 부대찌개, LA갈비와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 식품과 배달 음식의 소비도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다.
◇요리의 왕, 왕들의 요리사
미식가의 세계를 탐구하려면 양대 진영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한편은 요리하는 쪽이고, 다른 한편은 그것을 먹는 쪽이다. 그 중간에 양쪽을 기웃거리면서 비평하는 소수도 있다. 어쨌거나 서양 미식의 역사에서 요리하는 쪽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요리사들의 왕이요, 왕들의 요리사’라고 일컬어지는 ‘마리-앙투안 카렘’(Marie-Antoine Careme, 1784~1833)이다. 요리와 미식의 세계에서 그의 자취는 넓고도 깊다.
카렘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식탁 외교의 달인 탈레랑을 빼놓을 수 없다. 탈레랑은 일찍이 카렘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발탁했다. 자신의 주방장으로 12년이나 곁에 두면서 자신이 주최하는 연회의 요리를 맡기는 것은 물론 유럽의 지도자들과도 연결해 줬다. 탈레랑은 “회의는 춤춘다”라는 말로 유명해진 빈회의에 참석하면서 루이 18세에게 “회의에는 외교관보다 요리사를 데려가고 싶다”고 건의했다. 그 요리사가 바로 카렘이다.
마리-앙투안 카렘은 나폴레옹 1세의 궁중 요리사였으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영국의 조지 4세, 빈회의의 영국 대표였던 외무장관 스튜어트 경, 파리의 사교계에 이름을 떨친 러시아 귀족 바그라티온 공비의 주방장으로도 일했다. 그는 요리사로서의 오랜 경력을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했던 신흥부르주아 로스차일드가에서 마무리 지었다.
로스차일드가에서 지낸 5년은 양측에 다 도움이 된 행복한 시간이었다. 카렘은 엄청난 급여와 절박하게 원했던 집필 시간을 보장받았고, 로스차일드는 카렘의 솜씨를 활용해 유대인 신흥 부자를 무시하고 냉대하던 파리 귀족 사교계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카렘은 제임스 로스차일드 부부가 구축한 미식의 전당에서 쇼팽, 로시니, 리스트, 빅토르 위고 등 당대의 저명 인사들과 교유했다. 시인 하이네는 로스차일드 저택에서 카렘을 만난 뒤 “16세기 정신이 품을 수 있는 것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결합됐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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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렘은 파리 빈민가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주정뱅이 아버지의 25남매 중 16째로 태어났다. 그는 10살 되던 해에 길거리로 내쳐졌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변두리 허름한 선술집에서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6년간 닥치는 대로 일했다. 16살이 됐을 때 카렘은 유명한 파티시에 실뱅 바이의 가게에 도제로 취업한다. 바이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카렘의 재주와 열정을 간파한 그는 기술 전수는 물론 왕성한 학구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여러모로 배려했다.
카렘은 이 시기에 글을 깨우쳤다. 그는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메뉴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는 주인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며 요리 이름을 수없이 반복해 옮겨적는 노력으로 문맹에서 벗어났다. 일하는 틈틈이 팔레 루아얄 근처에 있는 국립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한 카렘은 다양한 서적들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카렘은 건축학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특히 고전건축의 판화 컬렉션에 매료돼 건축입문서로 유명한 비뇰라의 ‘건축의 다섯 가지 질서에 관한 법칙’은 옆에 끼고 살았다. 그는 책에서 본 중국, 인도, 이집트, 그리스 유적의 여러 건축양식 특히 피라미드와 탑, 기둥, 들보의 구성법에서 영감을 얻어 케이크 디자인에 활용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 여러 단으로 쌓아 올려서 만든 데코레이션 케이크 ‘피에스 몽테’였다.
카렘의 저서 ‘파티시에 피토레스크’에는 정밀한 피에스 몽테의 데생이 110점이나 수록돼 있다. 그는 수도 없이 많은 피에스 몽테를 습작으로 만들었다. 그의 디저트는 예술 그 자체였다. 그는 건축과 요리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었는데, 훗날 “예술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회화와 조각, 시, 음악, 건축이다. 그리고 건축의 주요한 한 부분에 제과가 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대형 데코레이션 케이크 시장의 가능성을 예측한 바이는 상점 쇼윈도에 카렘의 작품을 진열했다. 케이크는 만들기 바쁘게 귀족 연회의 장식물로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연회장 중앙에 장식된 초대형 케이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카렘은 스무 살 남짓한 젊은 나이에 바이 상점의 주요 고객이었던 탈레랑의 요리사로 영입된다. 카렘의 재능을 알아보고 스카우트한 사람은 탈레랑가의 집사장이자 명요리사였던 부셰였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카렘은 1815년에 출간된 자신의 첫 번째 저서 ‘파리의 왕실 파티시에’를 부셰에게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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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생 분주할 수밖에 없는 정상의 요리사로 일하면서 1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건축과 파티세리의 상관관계를 설파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화를 위한 건축안’이나 ‘건축 프로젝트집’ 같은 책도 있다.
건축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1810년, 파리의 한 신문에 게재한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나는 디자이너도 건축가도 아니지만 뛰어난 예술애호가입니다. 나는 건축에 대한 선천적 미의식과 향상심을 가진 직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학교는 국립도서관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이집트나 그리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돌아다녔습니다.”
요리와 관련해서 그가 남긴 업적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프랑스 요리의 전형을 완성한 인물로 손꼽힌다. 프랑스의 소스를 크게 벨루테 소스, 베샤멜 소스, 에스파뇰 소스, 알망드 소스 등 4개로 분류한 체계는 뒤에 에스코피에가 약간의 변화를 주긴 했지만 지금도 서양 요리의 기본이 되고 있다. 소소하게는 끝이 금속으로 처리된 페이스트리 백으로 머랭을 만든 인물도 카렘이다.
슈크림을 얹은 장식케이크 크로캉부슈와 ‘천겹의 잎사귀’라는 의미의 밀푀유, 조지 4세의 외동딸 샤를로트 공주에게 헌정한 샤를로트도 그의 작품이다. 그 외에도 에클레르, 볼로방 등의 디저트를 창안하거나, 기존의 것에 변화를 줘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카렘이 발명한 요리는 100가지가 넘는다. 오늘날 사용되는 주방장 모자 ‘토크’도 카렘이 빈에서 스튜어트 경의 요리사로 있을 때 고안한 것이다.
카렘은 사망하기 3년 전에 ‘19세기 프랑스 요리의 예술’ 전집을 발간했다. 그의 생전에 3권까지 출간됐고, 나머지 두 권은 그의 제자가 간행했다. 책에는 수백 가지의 조리법과 메뉴, 테이블 세팅, 프랑스 요리의 역사, 주방의 조직에 관한 사항들이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제3권에는 수록된 소스만 200종류가 넘는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요리는 요리기술의 뛰어난 규범으로 후세에 남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을 남겼다. 요리책에 삽화를 도입한 것도 카렘이 최초였다. 그는 여러 가지 요리를 한꺼번에 식탁 위에 올려놓고 먹는 프랑스식 상차림을 순서에 맞춰 요리를 내는 러시아식으로 바꿔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프리실라 퍼거슨은 “카렘이 추구한 것은 파티시에나 요리사의 사회적 지위를 예술가의 경지까지 높이는 것이었다”고 했다.
1833년, 카렘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부터 숯불로 요리하면서 유독가스를 오랫동안 흡입한 것이 사인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1873년에 저술한 ‘요리대사전’에 “카렘이 죽은 뒤로 수많은 대공이 공국을 잃고 다수의 왕이 왕좌에서 내려갔지만, 천부의 재능이 있어 요리의 왕이 된 카렘의 지위는 지금도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그 영광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어떤 라이벌도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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