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은 설계 변경을 추진 중이지만 사업이 재개될 거란 기대감은 크지 않다.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를 통틀어 삼성물산이 수주한 정비사업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우성3차 아파트 한 곳 뿐이다. 사실상 국내 정비사업에 손을 뗀 거나 마찬가지로 설계 변경을 명분 삼아 시간만 끌고 있다는 게 A주택 조합 측 설명이다.
기존 시공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업체를 시공자로 선정하기 위해 A조합은 세차례나 입찰공고를 냈지만 모두 유찰됐다. 서울시가 빌려주는 정비사업 자금에도 손을 벌려봤지만 이미 올해 예산이 모두 소진돼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업을 아예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미 건설사로부터 빌려 쓴 돈만 90억원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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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정비사업 자금이 말라붙은 건 비단 A조합만이 아니다. 지난달 3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시내 곳곳의 재개발·재건축 조합들이 ‘돈맥경화’로 진통을 겪고 있다. 주로 부동산시장이 호황이던 2000년대 중후반에 시공업체를 선정한 단지들로, 착공 전 단계인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앞두고 건설사의 자금 지원이 끊긴 곳이 적지 않다.
서울 종로구 충신동 충신1구역 주택재개발조합은 A조합보다 사정이 더 딱하다. 보증금 4000만원, 월세 50만원에 계약한 조합 사무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보증금만 벌써 3000만원 넘게 까먹었다. 시공자인 현대건설은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1년 반 가까이 자금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단지는 지난해 말 서울시의 실태조사 대상에 올라 오는 9월에는 주민 투표를 통해 조합 해산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조합이 지금까지 현대건설로부터 빌려쓴 돈은 2011년 기준 28여억원에 달한다.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도 어렵지만, 조합원 452명이 사업 청산을 위해 이 비용을 나눠 부담할 의지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다. 조합 관계자는 “시공사가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하지 않고 설계 변경을 통해 사업성을 높이라는 요구만 반복하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금 대여가 중단된 조합이 속출하는 건 건설사들의 달라진 입장 때문이다. 곽창석 ERA코리아 부동산연구소장은 “건설사들이 주택시장 호황기에 막대한 개발이익을 노리고 공격적으로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수주했지만 요즘에는 시장 침체에 따른 사업성 악화로 정비사업에 소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 대형건설사 관계자도 “분양시장 호황기 수주했지만 아직 착공하지 못한 주택현장이 적지 않다”며 “이런 곳은 건설업체에서 자금 지원을 끊고 사실상 ‘손절매’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양쪽 이익 절충할 제도 개선 절실”
업계에서는 재개발·재건축 정비사업 지연 사태가 앞으로도 계속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서울 서대문구가 지난 4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관내 21개 구역 중 12곳(57%)이 “시공사로부터의 자금 지원이 원활하지 않다”고 답했다. 사업시행인가는 관리처분 이전 단계로 정비계획이 이미 확정돼 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이다. 올해 들어 건설사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조합은 13곳(61.9%)에 달한 반면, 최근 3개월 이내 자금 지원을 받은 조합은 7곳(33%)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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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한 정비사업이 주민 반발을 낳아 조합 해산으로 이어지면 비용 처리 문제를 둘러싼 조합과 주민, 건설사 간 갈등이 본격화할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관련 법에 따라 내년 1월까지 투표를 통해 주민 절반 이상이 동의하면 조합을 해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쓴 사업비를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조합이 ‘갑’, 건설사가 ‘을’이었지만 이제는 형세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며 “업체에서 일방적으로 지원을 끊기보다 양쪽이 이익을 절충해 사업을 정상화할 수 있는 제도 개선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