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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을 하다 보면 이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소송에서의 승패는 100 대 0의 싸움이 아니다. 유무죄의 흑백을 가리는 다툼 같지만 실제로는 51 대 49로 유죄가 되기도 하고 무죄가 되기도 한다.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복잡한 사실관계와 이에 대한 법리적 판단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다. 사소한 사실이 법관의 시각을 바꾸기도 하고 증인의 한마디 증언이 결론을 달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모두에게 공평한 적법 절차는 양보할 수 없는 대원칙이다.
그런데 여기에 돈과 힘의 논리도 가세한다. 여전히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믿는다. 큰 사건이면 어떻게든 전관 변호사를 선임하려고 애쓴다. 돈을 많이 쓰면 더 유리한 결론이 나올 거라고 기대한다. 때로는 여론의 힘을 이용하기도 한다. 수가 많을수록 법원이 압박을 받아 유리한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를 경쟁하는 지금의 형국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규범이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돈 있는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법치주의가 동작하는 것은 요원하다. 사회적으로 합의가 됐다고 생각해 왔던 규범이 온갖 논리에 의해 혼탁해지고 돈과 권력에 의해 모호해질 때 사회의 법적 기반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법치주의는 국가나 법원에 의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국민 모두의 노력과 지지가 필요하다.
재판에 승패가 있다고 해서 재판이 곧 전쟁은 아니다. 얼마 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두 나라의 병사가 백병전을 치르다 한 병사가 조용히 숨을 거두고 싶다고 하자 상대방 병사가 기다려주는 사이 “엄마,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폭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죽고 사는 전쟁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있는데 하물며 정치나 재판에서는 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어느 편이든 모두가 잘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이렇게 추위를 무릅쓰고 거리로 나가는 것인데 다른 반쪽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그런 국가를 만들 수 있겠는가.
어떠한 제도도 건강한 인간과 사회를 전제하지 않고는 제대로 동작할 수 없다. 혐오의 정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선한 제도도 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치는 존엄한 인간들이 불법적인 관여를 배제하고 절차적 정의를 소중히 여길 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다툴 때라도 경청이 필요하고 법관의 양심을 믿으며 돈과 권력에 오염되지 않는 사법 시스템을 지켜가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 오늘 대한민국에 ‘법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한민국에 용서, 연민, 사랑, 수용, 감사와 존중이 있느냐고 되묻고 싶다. 법치 이전에 회복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고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국민에 대한 수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