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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철칼럼]'색채가 없는' 사람들의 시대

오성철 기자I 2013.07.19 07:01:25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주인공 쓰쿠루는 고교시절 단짝이었던 5명 중 자기 이름에만 색깔이 없는 것에 대해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각자 이름 속에 있는 색깔을 따라 ‘아카(빨강)’ ‘아오(파랑)’ ‘시로(하양)’ ‘쿠로(검정)’라는 애칭이 있었던 4명과 달리 그냥 ‘쓰쿠루’라고 불렸던 그는 스스로를 개성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때 영문도 모른 채 모임에서 퇴출당한 쓰쿠루는 극도의 상실감에 한때 죽음의 입구에서 지내야 했다. 이후 16년 동안 절대적인 고독 속에 살아 오던 그는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여자친구의 조언에 따라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자신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시로’의 거짓말이 절교의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렇게 몰아갔던 시로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들으며 분노와 허탈감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다. 바로 결코 밋밋하고 존재감없는 인물이 아니었던 자신의 실체다. ‘그는 그룹 내에서 늘 호감을 주고 가장 정신적으로 강한 존재였으며 실제 이성으로서 사랑을 느꼈다’는 친구들의 고백에 깜짝 놀란다. 모두 개성이 강한 친구들이었지만 실제 무게중심은 ‘중용에 가까웠던’ 쓰쿠루였다. 때문에 그를 내쫓았던 모임이 뿔뿔이 흩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문득 ‘색채가 없는’ 쓰쿠루는 대다수 우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내세울 것도, 뚜렷한 개성도 없어 이리저리 치여 사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이들이 사회를 이끌고 간다. 쓰쿠루처럼. 그 사회의 안정성이 높아진 것은 특별나진 않아도 ‘두루두루 괜찮은’ 부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들 중 스스로 특정한 색(色)을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상대방을 특정한 색깔 속에 가둬 놓으려는 불온한 시도는 끊이질 않는다. 정치권의 이념 논쟁이나 정통성 시비가 그렇다. 얼마 전에는 야당의 대변인이 대통령을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의 후손이라고 발언해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여당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리하게 공개하며 “노무현 전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 포기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등 이미 고인이 된 이의 부관참시를 서슴지 않는다.

저주에 가까운 섬뜩한 독설을 들을 때마다 과연 상생의 정신이 있는건지, 역지사지(易之思之)하려는 마음은 있는지 의문이 솟는다. 틈만 나면 색깔을 덧씌우고 과거를 옭아매려는 퇴행적인 수법은 ‘나를 강간했다’는 시로의 모함과 다를 게 없다. ‘중용의 쓰쿠루’를 몰아 내려는 시도다.

한쪽으로만 치닫는 극단(極端)은 혁명기나 혼란기에나 통용됐다. 프랑스 대혁명때 자코뱅당이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 세력을 단두대로 보낸 것이나 중국의 문화혁명때 홍위병이 설쳤던 것도 격동의 시기였기에 가능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등장이 가능했던 것도 그만큼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시대에 있지 않다. 누가 정권을 잡아도 무방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심지어 북한이 미사일을 쏘아도 무덤덤할 정도로 안정된 시대를 살고 있다.

수차례 민주적인 선거를 거친 마당에 이념이나 정통성에 매달리는 건 후진적이다. 흑백으로만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유통기한이 지났다.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이 개성이나 신념이라는 이유로 존중받는 시대다. 하나의 색으로만 상대방을 몰아 가려는 시대착오적 발상은 퇴출돼야 한다. <방송에디터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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