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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의류 1번지 동대문도 높아지는 인건비와 빠르게 변화하는 고객들의 소비 패턴 변화로 점차 설자리를 잃고 있다.
동대문은 어떻게 패션 1번지가 됐나
의류 1번지 동대문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대문 근처는 지세가 낮아 군사 훈련을 하기가 용이했다 이에 따라 동대문 인근에는 군사 시설들이 다수 존재했다. 장충단 공원 자리에는 남소영, 세운스퀘어 자리에는 동별영이 있었다.
당시 군사들은 봉급으로 면포를 지급받았다. 군사들의 가족들은 지급받은 면포나 이를 가공한 옷가지를 내다 팔았다. 군사들도 쉬는 날엔 가족을 도와 면포를 파는 장사꾼으로 변신했다. 오늘날 동대문 지역의 패션타운의 기원이다.
1905년 7월 동대문 시장 관리를 위한 ‘광장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비로소 근대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김종한, 종로 상인 박승직, 거상 홍충현 등이 운영했다.
한국전쟁 때 시장 일부가 파괴됐지만 종전 후 피난민들이 생필품과 군수품을 거래하면서 구제 시장을 형성했다. 당시 부유층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옷감을 떼다 가족의 옷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기성복이 등장하면서 피복의 중심지였던 동대문 시장 내에서 분업과 수직 계열화가 일어나면서 동대문은 봉제공장의 메카로 등극해 현재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동대문의 영광은 빛이 바랜지 오래다. 2010년대 접어들면서 인터넷 쇼핑몰과 SPA 브랜드가 부상하면서 동대문에 가지 않더라도 저렴한 가격에 의류를 구입하기 쉬워졌다. 여기에 대형 의류 업체들이 아웃레에서 저가 공세에 나서면서 동대문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중국 저가 공세와 코로나19에… 동대문의 몰락
무엇보다 ‘동팔이’(동대문+팔이)라 불리는 악덕 상인들의 바가지 상술과 과도한 호객행위로 이미지가 추락한 점이 컸다. ‘교환, 환불금지’나 ‘현금결제’가 당연하게 자행됐고 어린 학생들에게는 반말과 욕설, 협박 등도 서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대안이 없었던 터라 울며 겨자먹기로 동대문을 찾던 고객들은 인터넷 쇼핑몰 등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은 것이다.
한국 고객들이 사라진 동대문 시장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메웠다. 특히 의류를 대량 구매하려는 중국 관광객들과 중국 중간상인들의 등장으로 호황을 이뤘다. 그러나 심화된 중국의존도는 양날의 검이 됐다. 동대문에서 의류를 수입해 팔던 중국 상인들이 점차 가격을 후려쳤고 아예 디자인을 베껴 중국에가 값싸게 대량 생산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매출이 줄었다.
동대문 상인들도 이런 흐름에 발맞춰 온라인 시장에 진출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스타일난다처럼 동대문 의류를 기반으로 성장한 플랫폼 기업이 나타나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도매상은 아직도 전자상거래 등에 익숙치 못한데다 전문 오픈마켓들과 배송, 사이트 관리 등에서 경쟁이 되지 않아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파고도 동대문을 휩쓸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의 사라진데다 중국과의 수출입도 사실상 막힌 탓이다. 한 동대문 도매상은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매출이 절반 이상 줄었다”면서 “원래 동대문 상점들은 빠른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경영을 하는데, 돈줄이 말라 어려움을 겪는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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