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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일제 핍박으로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보니 경평전은 1935년까지 계속되면서 서울, 평양시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 속에 치러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재 정부가 스포츠를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던 사례와 달리, 식민지에서 열린 도시 대항전은 오히려 피지배 대중들의 공동체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는 팀이 아니라 군(軍)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경평전은 경성군과 평양군 대결로 진행됐다. 양팀은 대체로 스포츠 활동 기반이 있던 대학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고 분단 이후에 경성군과 평양군 자체가 남북한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경평전은 축구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켜 전국에서 선수들이 몰려들었고, 경평전 자체는 중단됐으나 1938년에는 서울, 평양, 함흥 3도시 대항전, 서울을 중심으로 10개 팀이 참여한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등이 대형 스포츠 이벤트의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쟁에 몰두하던 일제가 1942년 강제동원을 위해 조선 전역에서 구기종목대회를 금지해버리면서 경평전은 해방 후에야 다시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이틀 동안 대회가 열렸는데, 경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만원 관중이 된 것은 물론 흥분한 팬들이 난동을 일으켜 경찰이 공포탄을 발포해 이들을 해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초 치러질 예정이던 3차전은 당연히 취소됐다.
축구에서 벌어진 감정싸움은 분단 체제 하 정부 수립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당시의 정치적 혼란상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 갈등은 관중 난동과는 비교도 안될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비화됐고, 그렇게 경평전은 예전 기록에서나 찾아볼 과거로만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