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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프레임 걷어내니…비로소 보이는 풍경 [국현열화]<4>

오현주 기자I 2025.04.04 07:40:00

△시대가 잊었던 위대한 유산 '임군홍'
일제강점기 새 기회를 찾아 중국으로
간판·광고 제작하며 그림 그리기 몰두
'고궁' '중국인상'…이국적 풍경 남겨
한국전쟁 발발, 좌파논란 치이다 월북
목숨 걸고 작품 지킨 유족 덕에 빛봐

임군홍의 ‘고궁’(1940s 초반). 1939년 스물일곱 살의 작가가 중국으로 이주한 뒤 그렸다. 생업을 위해 정착했던 한커우에서 기차로 10시간 거리를 무릅쓰고 작품활동을 위해 줄곧 찾았던 베이징의 한 풍경이다. 먼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세부적인 묘사보다 색감에 무게를 실어 짙어가는 어느 가을날 해 저무는 초저녁 고즈넉한 궁의 분위기를 실어냈다.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하는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린다. 캔버스에 유화물감, 60×7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오는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없이 펼쳐낼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전시에 한발 앞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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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1948년 어느 날. 서울 종로구 명륜동 한 가정집에 별안간 경찰이 들이닥쳤다. 화가 임군홍(1912∼1979)을 검거하기 위해서였다. 최승희(1911∼1967·무용가)를 그린 그림이 문제라고 했다. 우순부(지금의 교통부)의 신년 달력을 제작하면서 넣은 그림이었다. 2년 전 월북한 최승희가 썼던 갓이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이라는 점, 갓끈에 소련연방을 의미하는 숫자의 구슬을 넣었다는 점, 부채에 38선을 상징하는 선을 그렸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화가는 체포됐고 달력은 그 즉시 전국에서 모두 수거됐다. 황당한 해석이 그대로 증거가 되던 시절이었다.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서른여섯 살의 임군홍은 이 일로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임군홍은 딱히 정치적으로 주의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미술가였고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이었다. 아니다. 특별하긴 했다. 사상적인 면이 아니라 미술적인 면에서. 중국과 조선을 오가고,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을 넘나들고, 서양의 여러 모더니즘 경향을 두루 아울렀던 독특한 근대기 예술가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중국의 시카고’ 한커우에 7년 정착…베이징 오가며 작품활동

미술 좀 한다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일본으로 떠나던 1930년대, 임군홍은 중국으로 향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대륙을 차지하려는 야욕에 불타던 일본이 조선인의 중국 이주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던 때였다. 1939년 스물일곱의 임군홍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시대의 흐름에 용감하게 올라탔다. 넓은 중국 중에서도 임군홍의 선택지는 후베이성의 한커우(오늘날의 우한)였다. 우리에겐 코로나19의 발원지로 익숙한 지역이지만 그때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교통의 요지로 꼽혔다. 한때의 별명이 ‘중국의 시카고’였을 정도다. 임군홍은 거기에서 내리 7년을 살았다.

‘중국인상’(1940s)은 그가 살던 한커우 풍경을 그린 것이다. 당시 한커우 최고 번화가 골목에서 임군홍은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장을 보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상업미술회사도 운영했다. 각종 간판이나 도안, 버스광고, 벽화광고 등을 맡아 그리는 사업체였다.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 경성에서 운영하던 ‘예림스튜디오’와 비슷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인 서화가의 작품을 매입해 경성에 가져다 팔기도 했다. 그의 고객 중에는 간송 전형필(1906∼1962)도 있었다. 사업은 꽤 성공적이었다.

그림만 그리기도 바빴을 텐데 회사까지 차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임군홍은 여느 화가들처럼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었다. 가세가 기울면서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치기계공으로, 배달부로 부지런히 일을 했다. 생업에 쫓겼지만 특기이자 꿈이던 그림을 아예 놓을 수는 없었다. 저녁에는 화실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주경야독의 나날이었다. 치과에서 만난 신여성 간호사 홍우순(1915∼1982)과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한 후에는 가장으로서의 무게도 더해졌다. 1931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일제강점기의 미술 공모전)에 출품해 연속 입선하는 등 성과도 좋았지만 그림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그런 생활은 경성에서나 한커우에서나 다를 게 없었다.

한커우에 머무를 때 임군홍은 베이징을 여러 차례 여행했다. 기차로 족히 10시간은 걸렸을 길을 수차례 왕복하며 북해공원, 자금성, 이화원 같은 명소를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커우에서 평범한 삶의 모습을 소재로 삼은 것과 달리 베이징에서는 크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화폭에 옮겼다. 어느 가을 초저녁 무렵 중국의 거대한 궁을 그린 ‘고궁’(1940s 초반)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한커우의 ‘중국인상’에서는 화가가 풍경 안에 폭 들어가 있다면 베이징의 ‘고궁’에서는 화가가 멀리 떨어져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 거주자로서 경험하는 장소와 여행자로서 바라보는 풍경, 그 차이를 임군홍은 이렇게 풀어낸 것이다.

임군홍의 ‘중국인상’(1940s). 작가가 월북한 뒤 유족이 지켜온 유화작품 130여 점 중 한 점이다. 중국 한커우에 머무를 당시 이국적인 거리 풍경을 담아냈다. 차남 임덕진은 작품을 이렇게 해석했다. “긴 그림자를 드리운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을 엄마와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아이는 집에 가기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본다.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버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캔버스에 유화물감, 91×7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임군홍의 작품은 다양하다.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그림마다 다른 화법을 사용했다. 고전적인 것부터 인상주의나 야수파, 표현주의까지 서양의 현대미술을 두루 아울렀다. 각각의 방식을 섭렵한 뒤, 그리는 대상에 맞는 방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것이다. 그만큼 재주도 좋았고 실험정신도 강했다.

조국이 광복을 맞은 이듬해, 임군홍은 중국에서 태어난 자녀를 데리고 부인과 서울로 돌아왔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그의 삶은 비슷했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며 돈을 벌어야 했다.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하고 ‘고려광고사’를 운영하며 기차역 대합실 광고를 도안하고 인쇄하는 일을 따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으나 결국 그의 발목을 잡은 것도 그 사업이었다. 그에게 곤욕을 치르게 한 최승희 달력을 제작한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임군홍은 피란을 가지 못했다. 고령의 어머니, 임신한 부인과 네 아이를 데리고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에 남은 대다수 화가들처럼 그는 인민군이 세운 미술제작소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 포스터, 벽보, 전단지 등을 그렸다. 전세가 바뀌어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하자 임군홍은 난처해졌다. 매순간 성실히 살았을 뿐인데 최승희 사건으로 수감된 이력에 북한 선전물 제작까지. 좌파 딱지를 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즈음 집을 찾아온 인민군을 따라 임군홍은 홀연히 사라졌다. 당시 그리고 있던 가족그림을 이젤 위에 그대로 놔둔 채였다.

◇주위 차가운 눈초리 견디며 긴 세월 작품 지켜낸 유족

작가는 북으로 갔지만 작품은 남쪽의 가족에게 남았다. 그의 부인은 가장을 대신해 다섯 남매와 시어머니, 몸이 아픈 시아주버니를 돌봤다.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집 안에 남은 물건을 몽땅 내다 팔았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작품은 목숨처럼 지켰다. 유품 하나 버리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돌아올 것 같았기에. 분단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임군홍의 부인이 타계한 후에는 그의 차남 임덕진(77)이 유작을 보존해 왔다. 아버지와 헤어질 때 세 살이었다. 기억은 흐릿해도 사명감은 뚜렷했다. 궁핍했던 시절에도 아버지의 작품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가 들지 않는 북향의 방에 작품을 보관했고 임군홍이 사용하던 종이와 화구박스, 보던 책도 간직했다. 온습조절을 위해 지금도 작품이 있는 방에는 난방을 하지 않는다. 임군홍의 대표작 다섯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도 그다.

미술사를 이끌어가는 주역은 당연히 미술가다. 그런데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또 있다. 미술가의 가족이고 유족이다. 북으로 간 화가들의 유족은 더욱 그렇다. ‘납북·월북작가 해금조치’가 내려진 1988년까지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를 견디며 아무도 몰라주던 작품을 목숨처럼 간직했다. 어렵고도 긴 세월 동안 작품을 지킨 유족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소중한 우리 미술가들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임군홍의 유족도 그렇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유산을 기어코 지켜낸 묵직한 책임감. 그 덕분에 우리의 근대기를 빛낸 미술가 임군홍을 잃지 않았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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