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에서 매일 벌어지는 풍경입니다. 한국 직장인에게 IRP(개인형 퇴직연금) 계좌는 무엇일까요? 퇴직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드는 ‘귀찮은 통장’, 그리고 돈이 들어오자마자 해지해 버리는 ‘잠시 스쳐 가는 환승역’에 불과합니다. Part 1에서 이미 이 ‘유리 연금’ 현상을 진단했지만, 이 계좌가 애초에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제도가 처음 탄생한 미국에서 IRA는 단순한 통장이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자유의 배낭(Freedom Backpack)’에 가까웠습니다. 도대체 이 계좌에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런 비유가 어울리는 걸까요? 시계를 1970년대 미국으로 돌려보겠습니다.
1970년대, ‘떠돌이 노동자’의 빈손
1970년대 초반, 미국 경제가 흔들리며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구조조정을 했고,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짐을 쌌습니다. 여기 성실한 어느 용접공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은퇴 시점에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 그가 너무 자주 이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업 연금(DB)은 오래 근속해야 비로소 온전한 수급권(Vesting)이 생기는 구조였습니다. 한 직장에서 긴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몇 년마다 회사를 옮겨 다닌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충분한 연금 권리를 확보하기 어려웠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순간, 아직 자신의 것으로 굳어지지 않은 노후 자금은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에게 이직은 노후 불안을 의미했습니다. 연금은 아직 회사를 따라 움직이는 돈에 가까웠지, 개인을 따라다니는 돈이 아니었으니까요.
IRA의 탄생 — “내 연금은 내 배낭에 담아 간다”
이 문제를 줄이기 위해 1974년, 미국 의회는 ERISA를 통과시키며 IRA(Individual Retirement Account)라는 계좌를 만듭니다. IRA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직장 연금이 없는 사람에게도 노후 저축 통로를 열어주는 것, 그리고 회사를 옮기는 사람이 이미 확보한 연금 자산을 세제상 불이익 없이 옮겨 담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도의 철학은 단순했습니다. “회사를 떠나도, 노후 자산은 노동자를 따라가야 한다.” 근로자는 이 돈을 현금으로 받아서 써버리는 대신, 자신만의 개인 금고에 집어넣고 잠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금고는 회사가 바뀌어도, 이직을 여러 번 해도 사라지지 않고 평생 그의 등 뒤를 따라다닐 수 있었습니다. 마치 여행자가 메고 다니는 배낭처럼 말이죠. IRA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사람을 회사라는 울타리에만 묶어두지 않고 이미 쌓은 노후 자산을 개인의 이름으로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휴대용 금고’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금의 기준도 중요합니다. 미국의 전통적 IRA는 기본적으로 “어느 회사에서 몇 년 일했는가”보다 “이 돈이 세제 혜택을 받은 은퇴계좌 안에 머물러 있는가, 언제 인출되는가”를 봅니다. 직장을 옮겨도 적격 연금자산을 IRA로 넘기면 세금은 계속 뒤로 미뤄집니다. 59.5세 전에 꺼내면 예외 사유가 없는 한 추가 세금이 붙고, 73세 이후에는 최소한의 금액을 인출해야 합니다. 인출할 때는 대체로 그해의 일반소득으로 과세됩니다. 재직기간이 아니라 계좌와 인출 시점이 세금의 중심축인 셈입니다.
한국의 IRP — 금고를 부수고 곶감을 빼먹다
2012년, 한국도 이 제도를 본따 IRP를 도입했습니다. 취지는 훌륭했습니다. 잡 노마드 시대에 퇴직금을 조각내지 말고 IRP라는 배낭에 모아서 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Part 1에서 확인한 그대로입니다. 배낭에 돈이 들어오자마자 배낭을 찢어버리고 돈을 꺼내 쓰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왜 우리는 금고를 부술까요? 제도의 ‘유인책’이 잘못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이 IRA를 쉽게 깨지 않는 이유는 의지력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예외 사유가 없는 한 59.5세 이전에 배낭을 열면, 국세청이 소득세와 별도로 10%의 추가 세금을 물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꾹 참고 가져가면 강력한 세금 유예 혜택으로 복리의 마법을 선물합니다.
반면 한국은 세금의 꼬리표가 여전히 재직기간에 강하게 묶여 있습니다. 퇴직할 때 어느 회사에서 얼마나 일했는지를 기준으로 퇴직소득세가 계산되고, 그 세금이 IRP 안에 ‘이연퇴직소득세(퇴직금을 바로 찾아 쓰지 않고 연금 계좌에 넣어둘 때, 세금 납부 시점을 실제로 연금을 탈 때까지 뒤로 미뤄주는 소득세)’라는 꼬리표로 따라 들어옵니다. 나중에 연금으로 받으면 그 세금이 일부 줄어들지만, 출발점은 여전히 과거의 재직기간입니다. 그래서 이직이 잦아질수록 IRP는 사람을 따라가는 단순한 배낭이 아니라, 회사별 근속기간과 세금 꼬리표를 계속 관리해야 하는 복잡한 보관함이 됩니다.
이 차이가 현실에서는 치명적입니다. IRP를 깨도 가입자가 체감하는 불이익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퇴직급여로 이전된 돈은 결국 원래 낼 퇴직소득세를 내고 찾아가는 구조로 느껴지기 쉽고, 유혹은 가깝습니다. 그러니 당장 차를 바꾸고 싶은 욕망 앞에서 IRP는 속수무책으로 털리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유독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제도가 해지의 문을 너무 넓게 열어두고, 세금마저 개인의 생애가 아니라 과거 재직기간에 묶어둔 탓이라는 것을 이제는 그 역사적 뿌리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IRP를 ‘평생 자산 관리의 허브’로
이제 IRP는 단순한 ‘퇴직금 수령용 깡통 계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회사 간판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된 IRP 계좌의 잔고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합니다. 단순히 “해지하지 말라”고 캠페인을 할 것이 아니라, 중도 인출에 대한 페널티를 강화하여 ‘깨면 손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여러분의 IRP 계좌를 점검해 보십시오. 잠시 스쳐 가는 환승역입니까, 아니면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지켜줄 든든한 금고입니까?
이제 개인이 짊어진 위험(DC 제도), 선택하지 못하는 개인을 돕는 운용 기본값(디폴트옵션), 그리고 이직해도 돈을 담아둘 그릇(IRP)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장부터는 질문의 단위를 퇴직연금 시장의 작동 장치로 넓혀 보겠습니다. 계좌가 이어져도, 가입이 자동화되어도, 세금과 수수료가 정교해도, 결국 돈이 제대로 불어나지 않으면 연금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첫 번째 장치는 수익률 경쟁입니다. 개인에게 계좌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 계좌 안의 돈을 제대로 굴리게 만드는 경쟁과 퇴출의 규율까지 갖춰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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