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달러를 원화로 환산하면 약 1427조원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2026년 예산 728조원의 2배 가까이 되는 엄청난 액수다. 불과 49년 전인 1977년 처음으로 연간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했을 때만 해도 누구도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4년 수출 1억달러, 1995년 1000억달러, 2011년 5000억달러를 넘어선 한국은 이제는 ‘글로벌 5강’의 수출국가를 비전으로 삼고 있다.
이번 수출 호황은 단순한 경기 회복 국면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더 뿌듯하다. 인공지능(AI) 산업 확산이 촉발한 글로벌 투자 사이클이 한국 경제에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어서다. 올해 1~7월 누적 반도체 수출은 2333억달러로 전체 수출 증가세를 견인해왔다. 글로벌 AI 투자 확대 흐름을 한국 경제가 주도하고 있는 셈이다.
더 반가운 점은 반도체에만 기대 수출 증대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반도체 수출이 6~7월 두 달 연속 400억달러를 넘어서며 수출 호황을 이끌고 있지만 20대 주력 수출품목 중 가전을 제외한 19개 품목 수출이 모두 증가했다. 반도체 외 품목 수출 증가율도 26%에 달한다.
과거 한국 수출이 소수 제조업 품목에 의존했다면 이제는 산업 저변이 한층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 시장에서 ‘K’ 브랜드의 경쟁력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이다.
그러나 수출 1조달러 시대를 이야기하는 지금, 한국 경제는 전형적인 K자형 양극화를 보이고 있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면서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의 중심에 섰지만 고금리·고물가에 가처분 소득이 쪼그라든 서민과 고사 위기에 몰린 자영업자, 중소기업들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일 업무보고에서 ‘K양극화’ 해소를 강하게 주문한 것도 이 같은 현실 인식에서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정관 산업부 장관에게 “우리 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K자 성장의 양극화”라며 “중소기업들, 소재·부품·장비 등 전후방 관련 기업들이 수평적으로 네트웍을 유지하면서 상생해야 건전한 산업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대응책을 주문했다.
수출이 늘고 경제 규모가 커져도 그 성과가 일부 산업과 일부 계층에만 집중된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경제는 나아질 수 없다. 성장의 과실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구조라면 수출 1조달러 역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한국 경제는 이미 양극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청년들은 좋은 일자리가 특정 산업과 특정 지역에 집중된 현실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방은 인구 유출과 산업 공동화에 직면해 있다. 내수와 수출의 온도 차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는 승승장구하는데 골목상권은 얼어붙는 기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수출 경쟁력 자체도 결국 건강한 산업 생태계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대통령의 지적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업도 수많은 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이 뒷받침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수출 1조달러 시대의 성공 여부를 논할 때 수출액은 물론, K양극화를 얼마나 줄였는가도 하나의 평가 지표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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