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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혼양재(韓魂洋才)[최기훈의 외국기업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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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기자I 2026.10.17 0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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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생활 경험없이 외국계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국내 기업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뒤 30대 후반에 외국계 기업으로 옮겨 고위 임원까지 지낸 금융인은 흔치 않다. 저자가 들려주는 외국계 기업의 문화와 업무 방식, 그 안에서 부딪히고 배운 생생한 장면들은 외국계 기업 취업과 커리어 전환에 관심 있는 2030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한혼양재(韓魂洋才)[최기훈의 외국기업 생존기]
[최기훈 아자스쿨 이사] “영어 이메일에서 받는 사람 이름 뒤에 있는 BJN, SMN이 무엇인가요?” 어느 날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BJN은 부장님, SMN은 상무님이라는 한국 직급을 의미한다”고 답하고 “서양식으로는 이름만 쓰면 되는데 한국에서는 그게 무례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직급과 존칭을 영어 이니셜로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는 무척 신기하게 생각하며 한국 사회에서 직급체계와 나이가 갖는 강력한 의미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는 모습이었다.

외국계에서도 한국식 기업문화를 흔히 볼 수 있다. 대주주는 해외의 글로벌 기업이지만 한국 지사의 임직원 다수가 우리나라 사람이거나 원래 우리나라 토종기업이었는데 외국 기업에 인수됐다면 아무래도 우리나라 관습에 익숙할 것이다. 호칭뿐만 아니라, 회의 때 자리 배치, 퇴근 눈치 보기에도 연공서열이 남아 있다. 승진 심사 때도 나이를 고려하게 된다. 이메일 보낼 때 받는사람 넣는 순서까지 신경 쓰는 사람도 있다.

원래 타운홀은 경영진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형식과 의전을 중요시하는 행사가 되기도 한다. 동영상과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높은 사람들의 소개 순서와 동선까지 촘촘하게 챙긴다.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이 없어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질문할 사람들을 미리 정해 연습을 시킨다. 그리고 여러 차례 리허설을 하며 작은 실수도 막기 위해 점검을 반복한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한혼양재(韓魂洋才)라는 말이 떠올랐다. 과거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대에 나온 말인데 한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과 체제를 융합한다는 뜻이다. 글로벌 조직의 매트릭스 구조, 계량적 성과 측정, 개인주의와 사생활 보호 등 서양식 시스템을 수용하면서도 구석구석 한국의 정서와 관례가 자리 잡고 있다. 업무 규정은 서양식이고 이메일도 영어로 쓰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예의와 위계가 남아 있다.

다른 나라와 교류가 늘어나니 글로벌 스탠다드로 일하는 방식을 익히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서양식 기업문화가 항상 앞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기업문화를 경험해 보고서는 부러워하는 외국인들도 많다. 무엇보다 강력한 추진력과 빠른 일처리가 주목을 받는다. 또 우리나라 직원들의 폭넓은 지식과 정확한 일솜씨는 다른 나라에서 흔하지 않아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 많다. 효율적이고 정성이 가득 담긴 고객 응대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고위직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은 윗사람을 잘 모시는 한국의 문화를 맘에 들어 한다.

직장인들이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직장인들이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어떤 외국인은 우리나라 직장 동료들 사이의 강한 유대감을 높이 사기도 한다. 점심시간에 서양에서는 각자 편한 시간에 개별적으로 먹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직원끼리도 열심히 미리 약속을 잡아 어울려 식사를 하고 차도 한잔 한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한 미국인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모든 사무실 빌딩에서 인파가 쏟아져 나와 삼삼오오 어울려 식당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연결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놀라워했다. 끈끈한 회식 문화나 윗사람이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음식에 손대지 않는 예절도 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실제 일은 사람 사이의 신뢰를 통해 풀리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기업에서도 이메일만 주고받다가 직접 만나 식사라도 하며 친분을 쌓으면 그 다음부터는 업무 협조가 훨씬 원활해진다. 개인의 사생활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편하고 자유롭기는 하지만 공동 목표를 지향하는 회사에서는 동료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서로 배려하는 문화도 필요하다. 물론 이런 모습이 지나칠 경우 관계에 치중하해 부조리가 생기고 조직이 권위적으로 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

한국에 있는 외국계 기업은 ‘완전한 외국 회사’와는 다르다. 한혼양재인 경우가 많다. 나는 이 퓨전이 순수한 외국식 기업문화보다 더 경쟁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국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만 하기 보다는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장점도 잘 살렸으면 한다.

■최기훈 이사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하나은행, 미래에셋증권, 피델리티자산운용,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SC제일은행 등 금융권에서 30여 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국내 최대 체험학습 플랫폼 아자스쿨에서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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