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제주의 속삭임을 들어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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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기자I 2026.03.13 06:00:46

손엔 지능형 마이크에 귀엔 고성능 헤드폰
발밑 화산송이 바스럼 섬휘파람새 지저귐
흩어졌던 자연 소음의 파편 귓가서 합주

지난 6일 제주 곶자왈에서 사운드워킹 체험을 하고 있는 여행객 (사진=이민하 기자)
[화순곶자왈(제주) 글·사진=이데일리 이민하 기자] 숲은 적요했다, 헤드셋이라는 ‘제3의 귀’를 달기 전까지는.

이달 초 제주의 원시림 화순곶자왈에 들어서자 태고의 정적이 몸을 감쌌다. 그러나 지능형 마이크를 켜고 고성능 헤드폰을 쓰자마자 풍경은 180도 바뀌었다. 발밑의 화산송이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고막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수천 년의 시간을 머금은 현무암 부스러기들이 발길에 차이며 내는 소리는 마치 달궈진 팬에 기름이 튀듯 날카롭고 생경했다. 마이크를 허공으로 들자 바람이 겹겹이 쌓인 나뭇잎 층을 밀어내는 소리가 거대한 격랑처럼 밀려왔다. 직박구리의 날카로운 경계음과 섬휘파람새의 청아한 지저귐은 숲의 층위마다 각기 다른 볼륨으로 울려 퍼졌다. 평소라면 무채색의 ‘배경 소음’으로 흘려보냈을 자연의 파편들이 일순간 선명한 주인공으로 격상되어 귓가에 꽂혔다. 제주 관광기업 ‘더사운드벙커’가 제안하는 ‘사운드 워킹’(Sound Walking)은 그렇게 닫혀 있던 감각의 문을 열며 시작됐다.

사운드벙커 사운드워킹 체험에 지급되는 지향성 마이크 (사진=이민하 기자)
◇앤트로포니에 갇힌 귀, 숲의 주파수에 맞추다

인간의 귀는 숙명적이다. 눈과 달리 자의로 닫을 수 없으며 잠든 순간에도 외부의 신호를 수신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열려 있는 이 감각기관은 과잉된 정보의 홍수로부터 뇌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필터’를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떠드는 시끄러운 카페에서 내 주문 번호나 내 이름만 선명하게 들리는 ‘칵테일 파티 효과’는 이 필터가 고도로 작동한 결과다. 문제는 도시의 소음에 최적화된 이 필터가 자연이 보내는 세밀한 신호와 생명의 목소리조차 ‘불필요한 소음’으로 분류해 지워버렸다는 점이다.

사운드 워킹은 이 필터를 잠시 거두고 자연 본연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는 인문학적 수행에 가깝다. 소리 생태학자들은 지구의 소리를 세 범주로 엄격히 구분한다. 바람, 비, 파도처럼 무생물적 자연이 내는 ‘지오포니’(Geophony), 새와 곤충 등 생명체의 지저귐인 ‘바이오포니’(Biophony), 그리고 자동차 소음이나 기계음처럼 인간이 만든 ‘앤트로포니’(Anthrophony)다. 앤트로포니의 인공적 소음에 함몰되어 살던 현대인에게 사운드 워킹은 태초의 자연이 보유한 지오포니와 바이오포니를 다시 수혈받는 정서적 회복의 시간이다.

특히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의 식물이 한자리에서 공존하는 화순곶자왈은 소리의 질감부터 다르다. 울창한 식생이 소리를 흡수하고 반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독특한 잔향은 오직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청각적 유산이다. 바위 구멍인 ‘숨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정한 온도의 공기는 숲의 폐부처럼 작동하며, 생물들이 가장 안락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사계절 내내 유지해 준다. “경청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주세요. 오늘은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입니다.” 프로그램을 이끄는 김도영 실장의 당부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제주 곶자왈에서 소리 수집을 하고 있는 이용원 사운드벙커 대표 (사진=사운드벙커)
◇사라지는 소리에 대한 비장한 기록

“제주의 유언을 녹음하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이용원 더사운드벙커 대표의 말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묵직한 경고로 다가온다. 자연의 소리는 영원하지 않으며 한 번 훼손된 소리의 생태계는 다시 복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주 내도동 알작지 해변의 명물이었던 ‘파도에 구르는 몽돌 소리’는 이제 과거의 기록으로만 존재한다. 4년 전 방파제 설치로 해안의 조류가 바뀌면서 수만 년간 자리를 지키던 몽돌이 유실됐고,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들리던 그 특유의 ‘차르르’ 하는 소리도 함께 절멸했다.

금오름 분화구의 맹꽁이 울음소리 역시 위태롭다. 양서류의 은신처인 화산송이 아래 습기가 관광객들이 재미 삼아 쌓아 올린 ‘소원 돌탑’ 때문에 증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 하나를 옮길 때마다 생명의 보금자리가 무너지고, 그들의 울음소리는 해마다 희미해진다. 이 대표는 “플라스틱을 쓰지 말라는 백 마디 구호보다, 한때는 풍요로웠으나 이제는 사라져가는 소리를 직접 듣고 느끼는 한 번의 경청이 사람의 환경 감수성을 근본적으로 바꾼다”고 말한다. 그는 환경부 산하 기관에서의 7년 근무를 뒤로하고 2020년 창업해 세계 최초로 사운드 워킹 프로그램을 체계화했다. 현재까지 101명의 전문가를 양성했고, 이 모델은 서울과 포천을 넘어 베트남 나트랑, 일본 홋카이도까지 퍼져 새로운 ‘에코 투어리즘’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6일 제주 곶자왈 풍경 (사진=이민하 기자)
◇소리는 ‘공공재’, 디지털 아카이브로 잇는 미래

이 대표는 소리를 물이나 공기와 같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공공재’로 정의한다. 사운드벙커가 보유한 국내외 200여 곳의 1000여 개 소리 파일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다. 이 파일들은 현재 호텔 로비, 공항 대기실, 병원 집중치료실 등에 납품되어 현대인의 심신을 달래는 ‘청각 치료제’로 쓰이고 있다. 수질이 오염되면 정수기가 등장하고 공기가 나빠지면 공기청정기가 필수품이 되었듯, 소음 공해에 노출된 도시인들에게 순수한 자연의 소리를 공급하는 ‘소리 아카이빙’은 미래의 핵심적인 환경 비즈니스가 된 셈이다.

체험을 마치고 헤드셋을 벗자 선명했던 숲의 목소리가 다시 안개 속으로 멀어지며 먹먹한 정적만이 남았다. 자연은 늘 거기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으나, 우리가 그 소리에 응답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대표는 말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듣는 이 소리들을 언젠가는 음원으로 밖에 들을 수 없는 날이 올 겁니다. 환경보호는 이제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사운드 워킹 100% 즐기기 가이드

제주 관광벤처 ‘사운드벙커’가 운영하는 사운드 워킹 체험은 제주 화순곶자왈에서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2명 이상 신청한 경우 진행된다. 체험 소요 시간은 약 2시간이다. 숲 속에서 산책해야 하기 때문에 긴 바지와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다. 가격은 1인 3만 5000원, 10인 이상은 3만 3000원이며 신청은 ‘사운드 워킹’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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