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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가수 현숙 씨 아니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 뒤 손에 들고 있던 시원한 음료를 건넸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남성은 감격한 표정으로 그녀가 차에 올라 떠날 때까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대중이 현숙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효녀가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정작 현씨는 그 말을 꺼내자 손사래를 치면서 “부모님을 모신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제가 효녀라고 하면 오히려 부끄러워요”라고 했다. 특별한 효도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현숙에게 부모 이야기는 자랑보다 그리움에 가까웠다.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어린 딸이 걱정돼 곁을 지켜준 어머니, 그리고 훗날 병환으로 거동이 어려워진 부모 곁을 이번에는 딸이 지켰다. 아버지는 치매를 앓았고 어머니는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 지냈다.
현숙은 방송과 공연으로 전국을 오가면서도 부모를 홀로 둘 수 없어 직접 모시고 다닌 날이 많았다고 했다. 그 시간은 나눔과 봉사로 이어졌다. 거동이 어려운 어머니를 직접 씻기며 목욕 한 번이 얼마나 큰일인지 절감했고 그 경험은 이동식 목욕차 기부로 이어진 것이다. 단발성 선행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은 불편에서 출발한 나눔이었다.
“일이 있으면 즐거워요.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또 뭔가를 할 수 있으니까요.” 무대에서 받은 사랑을 다시 누군가의 삶으로 돌려주는 것. ‘효녀가수’라는 익숙한 수식어 뒤에는 그렇게 노래와 돌봄, 나눔을 한길로 이어온 현숙의 시간이 있었다.
-가수가 된 계기는.
△어렸을 때는 꿈이 자꾸 바뀌지 않나. 나도 그랬다. 학교 다닐 때 공으로 하는 운동에 소질이 있어 배구를 했다. 합숙훈련을 하면서 친구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하면 나도 같이 노래했다. 그러다가 군산 서해방송 노래자랑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냥 한번 나가봤다. 그런데 거기서 1등을 했다. 나도 놀랐다. ‘어? 나한테 이런 재능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어땠나.
△나는 전북 김제 시골에서 올라온 소위 ‘촌년’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특별한 배경도 없었지만 인복은 있었던 것 같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처음에는 갈 데도 없으니 아침 일찍 사무실에 가서 청소도 하고 노래 연습도 했다. 그러다 ‘쟤가 참 열심히 하네’ 하고 눈여겨봐 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면서 하나씩 기회가 생겼다. 살면서 느낀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서 인생도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데뷔하자마자 이름을 알린 것은 아니었나.
△처음부터 금방 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신인이니까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나한테 맞는 노래를 만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정말로’가 사랑 받으면서 많이 알려졌다.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이기도 하다. 객석에 마이크를 갖다 대면 다 같이 ‘가슴이 찡하네요 정말로’를 부른다. 그럴 때면 참 신기하다. 노래 한 곡이 몇십 년이 지나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가수에게는 그게 정말 큰 행복이다.
-무대에서 객석으로 자주 내려간다.
△내가 무대에 올라가면 객석을 많이 본다. 그러면 어르신들이 보인다. 무대 가까이 오고 싶어도 몸이 불편해서 앞으로 못 오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이 못 오시면 내가 내려가면 된다. 가서 손 한번 잡아드리고 안아드린다. 어떤 어르신은 내 손에 1만원짜리를 꼭 쥐여주면서 엄마 아빠도 안 계신데 맛있는 것 사 먹어라고 한다. 그분에게는 쌈짓돈이다. 나한테는 그 1만원이 몇억원보다 귀하다. 돈이 아니라 마음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팬들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부모님을 대하듯 살갑다. 그래서인지 효녀가수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 말을 들으면 정말 부끄럽다. 부모님을 모시는 건 자식이면 당연한 일 아닌가. 남들은 내가 부모님께 굉장히 잘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오히려 죄송한 마음이 크다. 내가 어린 나이에 가수를 하겠다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니 엄마가 얼마나 불안했겠나. 어린 딸 하나 지키려고 엄마가 서울까지 따라왔다. 가끔 ‘엄마가 그냥 고향에 계셨으면 더 건강하게 오래 사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 자랑스럽다기보다 미안하고 그립다. 그때는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병환을 앓으셨나.
△아버지는 치매를 앓았고 어머니도 중풍으로 오랫동안 누워 계셨다. 집에 두 분만 두고 내가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에 모시고 다녔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가는 곳이 어디라고 늘 이야기하며 다녔다. 행사장에 가면 무대 바로 앞에 돗자리를 깔고 부모님을 앉혀드리기도 했다. 내가 노래하러 올라가야 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내 노래 끝날 때까지만 우리 부모님 좀 봐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러니까 부모님과 전국을 같이 다닌 셈이었다.
-진짜 효녀다. 공연과 부모님 간병을 함께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낮에는 돈을 벌어야 했고 밤에는 부모님 곁에 있어야 했다. 우리 아버지는 얌전한 치매가 아니었다. 밤새 사람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엄마는 거동도 못 했고 혼자 물 한 모금도 못 마셨다. 오랫동안 영양 공급관에 의지해 지내셨다. 내가 지방 공연을 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면 아무리 피곤해도 엄마부터 봤다. 기저귀는 괜찮은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다 보고 나서야 누웠다. 그래야 잠이 왔다. 그걸 부모님만 위해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나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내가 안 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마지막까지 못 해드렸으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겠나.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힘들었던 때가 오히려 더 그립다.
-그 경험이 이동식 목욕차 기부로 이어졌나.
△엄마를 직접 목욕시켜보니까 알겠더라.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한 분 목욕시켜드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번 목욕시키고 나면 나도 몸이 힘들어 며칠씩 앓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목욕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2004년부터 일을 해서 돈이 생기면 한 대씩 마련하기 시작했다. 일이 많을 때는 조금 더 빨리 마련할 수 있었지만 일이 없을 때는 못 하기도 했다. 코로나 때는 일이 없어서 쉬었다. 그렇게 하나씩 이어온 게 지금은 20대 정도가 됐다. 목욕차 한 대가 늘어날 때마다 자식 하나 생긴 것처럼 좋다. ‘아, 또 어디선가 어르신들이 조금 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최근 하림 ‘훌라면’ 광고를 찍었을 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목욕차 한 대를 또 할 수 있겠구나’였다. 나는 원래 내 생활에 큰 돈을 쓰는 편이 아니다. 하루 먹고사는 데 얼마나 필요하겠나. 콩나물국밥 한 그릇이면 9000원이고, 가끔 고기를 먹는다고 해도 내가 얼마나 먹겠나. 그래서 내가 쓸 것보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걸 하나 더 해줄 수 있다는 게 좋다. 이번 광고 수익도 잘 모아 목욕차 한 대를 더 마련해 필요한 곳에 보내고 싶다. 내가 일이 생기면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돈을 벌어서만 좋은 게 아니다. 일을 해야 또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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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만 딱 주고 “잘 쓰세요” 하고 오지 않는다. 직접 가서 목욕도 시켜드린다. 우리 엄마 목욕시키듯 한다. 어르신들도 다 누군가의 엄마이고 아빠 아닌가. 한번은 지방 공연을 갔다가 만난 분이 “우리 남편이 그 차 덕을 봤다”며 참기름 한 병, 들기름 한 병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런 걸 받으면 참 고맙다. 그냥 참기름, 들기름 한 병이 아니라 그분들 마음 아닌가.
-다양한 기부를 꾸준히 이어왔다. 사랑의열매 ‘아너 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 회원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어렸을 때는 정말 넉넉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12남매가 함께 자라다 보니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가수가 되고 사람들이 내 노래를 사랑해준 덕분에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게 됐다. 그게 참 감사하다. 아너 소사이어티에도 가입했고 아픈 아이들이나 어려운 가정을 돕는 일도 해왔다. 보육시설에도 마음을 보탰다. 고향 김제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도 내고 어르신들을 돕는 일도 꾸준히 해왔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목욕차뿐 아니라 세탁이 어려운 분들을 위한 이동 세탁차도 지원했다. 고향에서 일을 해서 돈이 생기면 그 돈은 아예 두고 온다. 어르신들을 위해 쓰거나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내고 온다. 한 번 크게 하고 끝내는 것보다 할 수 있을 때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돈이 많아서 하는 건 아니다. 일이 많으면 조금 더 하고 일이 없으면 못 할 때도 있다. 그래도 다시 일이 생기면 또 시작한다. 일이 생기면 ‘이번에는 뭘 살까’보다 ‘이번에는 어디에 하나 더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렇게 하나씩 이어가는 게 내 방식이다.
-낮추고 비우며 나누는 삶이 배어 있는 듯 하다. 고향에 세워진 ‘효녀비’도 그런 삶의 흔적처럼 보인다.
△내가 세운 게 아니다. 고향 김제시에서 자리를 마련해줬고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1000원, 1만원씩 마음을 보탰다. 그렇게 1억 7000만원 정도가 모였고 그 정성으로 효녀비가 세워졌다. 거기에는 부모님 앞에서 내가 재롱을 부리고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모습이 담겼다. 주변에는 좋은 조각 작품도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작품을 만지거나 안고 가면 효자·효녀를 낳는다는 이야기도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재미있어한다. 지금은 할머니·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3대, 4대가 함께 많이 찾아와서 사진도 찍고 부모님 이야기도 한다. 그곳이 그냥 ‘현숙 효녀비’를 보러 가는 곳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들이 같이 와서 부모님도 한번 생각하고 자식들도 한번 생각해보는 곳이 됐으면 한다.
-고 송해 선생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부터 참 예뻐해 주셨다. 김제에서 올라온 어린 아이가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열심히 하고 다니니까 예쁘게 보신 것 같다. 어느 날은 “현숙이같은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아빠 하자고 했다. 우리 부모님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도 꼭 와주셨다. 내가 좋은 일이 있을 때도,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늘 옆에 계셨다. 항상 만나면 “밥 먹었냐, 굶고 다니지 마라,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어, 길 미끄러우니까 조심해”라고 하셨다. 그냥 아빠였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 가면 옆에서 또 “현숙아, 밥 먹었냐”라고 할 것 같다.
-직접 작사도 하나.
△가사는 그냥 생활 속에서 나온다. 지방에 갈 때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 기차를 타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내가 고향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남들은 나보고 촌년이라고도 했지만 나는 내 인생이 참 고마웠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내 인생에 박수’다. 좋은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결국 다 내 인생 아닌가. 그러니까 내 인생에 박수 한번 쳐주자는 것이다. ‘춤을 추는 탬버린’ 가사도 생활 속에서 나왔다. 노래방에 갔다가 탬버린을 보니 중학교 때 친구들과 노래 부르고 놀던 생각이 났다. 그러다 “훌라훌라 훌라, 춤을 춘다 탬버린”이라는 노랫말이 나왔다. 일부러 어려운 말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살다가 뭐 하나 딱 보이면 그게 노래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편하게 따라 부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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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라고 사랑 안 하고 싶겠나. 사람들을 만나면 맨날 “왜 아직 시집 안 갔어요?”라고 묻는다. 내가 안 가고 싶어서 안 간 게 아니다. 인연이 안 닿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이 그대로 노래가 됐다. 나도 사랑하고 싶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걸 그대로 썼다. 현실에서 느낀 감정을 쓰니까 사람들이 ‘내 얘기 같다’고 하는 것 같다.
-현숙씨 노래에는 ‘행복’이라는 메시지도 자주 등장한다.
△행복은 눈앞에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 손 한번 잡고 마주 보고 웃고 안아주는 것도 행복이다. 그래서 노래도 밝은 게 좋다. 너무 절망적이고 아프고 상처만 있는 노래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곡이 와도 너무 어두우면 바꿔달라고 한다. 살기도 힘든데 노래까지 듣고 더 힘들 필요는 없지 않나. 내 노래를 듣는 몇 분이라도 웃었으면 한다. 어깨 한번 들썩이고 같이 따라 불렀으면 한다. 나는 대중가수니까 대중하고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재석, 신봉선, 김신영씨 등과 같은 개그맨들의 ‘현숙 따라하기’는 어떻게 보나.
△나는 너무 좋다. 그런 게 너무 재밌다. 개그맨 후배들이 나를 흉내 내면 내가 또 그걸 그대로 따라 한다. 후배가 흉내 낸 ‘현숙’을 내가 다시 모창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더 웃는다. 그게 정말 재미있다. 뭔가 따라 할 게 있다는 것은 내 색깔이 있다는 뜻 아닌가. 사람들이 딱 보고 “아, 현숙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거니까 좋다. 김신영 씨 같은 후배들이 해주면 젊은 사람들도 나를 또 알게 된다. 후배들과 같이 웃고 즐기는 게 좋다.
-바쁜 일정에도 에너지가 넘친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어머니가 14년 동안 투병하면서 제대로 못 드시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굶어서 살을 빼는 건 싫다. 하루 세끼를 꼭 챙겨 먹는다. 대신 먹고 걷는다. 시간이 나면 밤늦게라도 걷는다. 보통 하루에 1만보 정도 걷고 많이 걸으면 2만보 넘게도 걷는다. 대중교통도 많이 이용한다. 일부러 운동 시간을 따로 내기보다 생활 속에서 계속 움직이려고 한다. 그리고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보다 미리 가는 편이다. 시간 나면 검사도 하고 피도 뽑아본다. 조기 발견, 조기 치료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래 아프셨던 부모님을 보면서 건강할 때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 아픈 데 없이 걸어 다니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
-앞으로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가수로 남고 싶다. 연예인이 좋은 일을 하면 그걸 보고 또 누군가는 따라 할 수 있지 않나. 좋은 마음도 그렇게 퍼진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노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신나게 노래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받은 사랑도 조금씩 돌려주고 싶다.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노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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