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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의 그림자: "스터드베이커의 배신과 수탁자 책임의 탄생"[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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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I 2026.09.01 06: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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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드베이커 공장 폐쇄 후 퇴직연금 불신 커져
美의회, '수탁자 책임' 정립한 ERISA법 제정
한국도 '사외적립' 의무화했지만 빈틈 많아
내 연금 '보관' 넘어 '보호와 증식' 요구해야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설마 대기업이 망하겠어? 회사가 망해도 내 퇴직금은 주겠지.”

많은 직장인이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을 믿는 근거는 ‘설마’라는 막연한 낙관입니다. 회사가 튼튼하니 내 노후 자금도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사에서 ‘영원한 기업’은 없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30년을 바친 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미안하지만 줄 돈이 없다”며 빈손을 내민다면 어떨까요? 이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1963년 겨울,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참극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연금 제도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Part 2 제3장에서 짚었듯, 아무리 후한 약속도 회사가 실제로 지킬 수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 이 장은 그 전제가 무너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첫 사례입니다.

1963년 겨울, 스터드베이커의 악몽

미국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이곳에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자동차 회사 스터드베이커(Studebaker)의 공장이 있었습니다. 한때 대통령이 탔던 마차를 만들었고, 세계대전 때는 군용 트럭을 납품했던 건실한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1963년 12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한 회사는 돌연 공장 폐쇄를 선언합니다. 공장 문이 닫히던 날, 근로자들은 실직의 공포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회사가 철석같이 약속했던 ‘연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사의 연금은 약속을 모두 감당할 만큼 충분히 적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은퇴했거나 은퇴 연령에 도달한 일부 근로자는 연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아직 그 경계에 닿지 못한 수천 명의 근로자는 약속받은 연금의 일부만 받거나 아예 받지 못했습니다. 40세에서 59세 사이의 근로자들은 연금 가치의 15% 안팎만 받았고, 더 젊은 근로자들 중 상당수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바친 대가치고는 너무나 잔혹한 결과였습니다.

분노가 만든 법 — ERISA와 ‘수탁자 책임’의 탄생

이 사건은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의회와 언론은 “기업의 약속만 믿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년 넘는 논쟁 끝에 1974년, 현대 연금법의 어머니라 불리는 ERISA(근로자퇴직소득보장법)가 탄생합니다.

이 법의 핵심은 명확했습니다. “기업의 돈과 근로자의 연금은 완전히 남남이어야 한다.” 이 법을 통해 정립된 개념이 바로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입니다. 연금 자산을 관리하는 자는 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오직 가입자의 이익을 위해 신중하고 충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법적 의무입니다. 이제 회사가 어렵다고 연금 통장에 손을 대거나 적립금 납입을 가볍게 미루는 행위는 단순한 경영 판단으로 넘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회사가 망해도 법정 한도 안에서 연금을 보호할 수 있도록 연금지급보증공사(PBGC)가 설립되어 최후의 안전장치까지 마련되었습니다. 스터드베이커의 눈물이 만들어낸 보디가드입니다.

한국의 현실 — ‘보디가드’는 없고 ‘창고지기’만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떨까요? 우리도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며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퇴직금이 증발되는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그 교훈에 따라 2005년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제정하며 기업의 돈과 퇴직급여를 분리하도록 하는 ‘사외 적립’을 의무화했습니다. 이미 확인했듯, 이것은 분명한 진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한국의 DB형 제도는 최소 적립 비율 규제는 있지만, 이를 어겼을 때의 제재와 시장 압력이 충분히 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재정이 어려운 기업들은 적립금을 100% 채우지 않고 ‘외상(미적립)’으로 남겨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사가 망하면 못 받는 돈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근로자의 자산을 지키고 불려야 할 ‘수탁자’라기보다, 단순히 돈을 보관해 주는 ‘창고지기’의 역할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그들에게 가입자 이익을 위한 합리적 절차와 근거를 설명하게 만드는 장치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내 연금의 주인은 누구인가

스터드베이커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섬뜩합니다. “법적인 강제와 감시가 없는 약속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한국의 퇴직연금이 진정한 노후 안전망이 되려면, 단순히 돈을 은행에 맡겨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기업의 눈치가 아니라 근로자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판단하도록, 수탁자 책임과 거버넌스 장치가 실제로 작동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퇴직연금은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단순히 창고에 쌓여 먼지만 쌓여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보관’을 넘어 ‘보호’와 ‘증식’을 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기업들은 이 무거운 책임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책임을 피할 틈새를 찾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연금 역사를 바꾼 거대한 ‘괴물’이 탄생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기업들이 DB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기 위해 찾아낸 그 틈새, 그리고 그로 인해 탄생한 DC(확정기여형) 제도와 401(k)의 탄생 비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DB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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