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준, 아뜰리에아키서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 문명-자연, 사람-동물, 흑백-컬러 섞고 동물 주역으로 '환경문제' 메시지 전해 대중 행동 바꾸는 브랜드 파급력 빌려 생태 경각심 일깨우는 '영리한 예술'로 현실적 유토피아 '헤테로토피아' 구현 지구온난화 재난 현장 뛰어든 신작 등 유쾌한 경고에서 한 걸음 나아간 행보
작가 정성준이 서울 성동구 아뜰리에아키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에 건 자신의 작품 ‘로맨틱 뷰’(2026, 227.3×291㎝) 곁에 섰다. 미국 뉴욕에 있어야 할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 한가운데 떠내려와 있는 장면은 이제껏 대도시를 배경으로 친절한 경각심을 내놓던 작업과는 결이 다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재난상황에 바로 뛰어들었다고 할까(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첫 시선은 친밀함이다. 흐트러짐 없는 정교한 붓끝이 데려간 곳이 말이다. 오늘 아침 내가 들렀을 수도 있는 바로 그 장소니까. 도시 한복판 대형 커피전문점. 큼직한 초록색 배경 간판에는 영어로 쓰였어도 이젠 한글로 읽히는 ‘스타벅스’라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발동하는 두 번째 시선은 호기심이다. 이 익숙한 풍경 앞에 익숙지 않은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으니까. 도시 생태계와는 거리가 먼 동물들의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하얀 북극곰은 외발 손수레에 허연 덩어리를 실으려 하고, 황제펭귄은 물이 흥건한 양동이를 들고 있다. 그 옆 너구리는 목청껏 뭔가 외치고 있는데. “우린 얼음이 필요해요!”(‘우리에게 필요한 작은 것들’ 2026).
정성준의 ‘우리에게 필요한 작은 것들’(2026, 60.6×60.6㎝). 고향 북극·남극으로 가져갈 얼음을 구하기 위해 스타벅스를 찾은 동물들이 등장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순간 ‘설마’ 했던 의심을 확신으로 뒤바꾸는 건 매장 유리에 붙은 포스터다. ‘글로벌 워닝’(Global Warning, 지구온난화), ‘스톱 라이트 폴루션’(Stop Light Pollution, 빛 공해 막아봐요) 등이 퍼뜩 눈에 들어오면서다. 아, 그저 동물의 귀여운 제스처 정도로 볼 게 아니었구나. “곰과 펭귄이 나르려는 건 얼음이다. 그 얼음을 얻으려고 커피전문점을 찾아온 거고. 손수레, 양동이에 얼음을 담아 고향인 북극·남극으로 가져가면 예전처럼 환경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다.”
정성준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 전경. 왼쪽으로 ‘펭귄! 운전은 처음이지’(2026, 72.7×50.0㎝)가, 오른쪽으로 ‘봐! 저기에 미래가 있어’(2026, 72.7×50.0㎝)가 걸렸다. 흑백톤으로 배경을 다운시켜 안팎의 세상을 구분하는 건 작가 화면이 가진 특징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 정성준(45·전남대 미술학과 교수). 그가 화면에 펼친 세상은 이미 누군가에겐 충분히 낯익은 장면이다. 장소를 달리하고 공간을 바꿨을 뿐 대도시로 진출한 동물들은 이미 화단의 주요 인사가 됐으니까. 사람을 엑스트라로 삼고 이들이 사실상 주역을 꿰찬 작품들은 미술시장에 탄탄한 허리로 제 몸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국내외 갤러리와 아트페어를 바쁘게 오가면서 말이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길 아뜰리에아키에 펼친 개인전은 그 부산하고 치열한 작가세계의 정중앙을 관통한다. 타이틀은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 국내 전시로서는 3년 만이지만 그 사이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터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이전과 다르다. 이상향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동물들이 작정을 한 모양이니.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챈 듯하다는 소리다.
정성준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 전경. 앞쪽에 ‘오, 나의 딸기 아이스크림!’(2026, 72.7×72.7㎝)이 걸렸다. 동물 친구들은 지구의 온도를 낮추는 데 아이스크림도 유용하다고 생각하는가 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대중 행동을 바꿔놓는 브랜드 영향력 이용해
동물이라면 으레 자연에 묻혀 있는 게 정상이었더랬다. 적어도 이 작가가 나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녹아내리고 불타버려서 안타깝지만 그래도 강 건너 사정이었던 건데. 그런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깨버린 게 바로 작가의 그림이었단 얘기다. 읍소하고 매달린 형태는 아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끈 다음에 어느 순간 ‘본론’에 데려다 놓는데. 유머러스한 장면 뒤에 슬쩍 메시지를 끼워 넣는 방식이다. 아주 부드럽고 대단히 세련되게. 가령 친근한 외형을 입은 동물들이 트램을 타고 복잡한 도시 거리를 가로지른다. 잠시 멈춰 선 정거장에선 사진도 찍고 청소도 하고. 그저 가볍고 경쾌하고 산뜻한 이런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면 과연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봐달라고 안달하지 않고도 눈길·발길 다붙잡는, 말 그대로 ‘영리한 그리기’가 아닌가.
작가 정성준이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에 건 한 점인 ‘행복이 멀리 있지 않아’(2026, 80×115㎝) 앞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전시작 중 유일하게 스테인리스스틸 판에 유화물감을 올려 제작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존’이다. 사람과 동물, 문명과 자연이 흑백이면서 컬러이기도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그 대통합을 위해 필요한, 지구 환경위기나 무너지는 생태에 대한 경각심을, 동물들로 대신 내세운 거다. 핵심은 이질적이지 않은 ‘섞임’에 있다. 거리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너도, 나도, 우리도 할 수 있어’ 2026), 사막화를 막자고 나무심기를 하며(‘우리가 함께 심는 내일’ 2026), 커피집 앞에서 친환경제품 사용을 권고하는(‘우리 아직 늦지 않았어’ 2026) 이 모두가 한 세상의 일원이 되지 않고선 벌일 수 없는 일이니까. 인간인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화해·통합·조화·융합을 위한 ‘실천’이란 얘기다.
정성준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 전경. 왼쪽으로 ‘우리가 함께 심는 내일’(2026, 91.0×91.0㎝)가 걸렸다. 동물 친구들이 잘못된 도시개발이나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사막화가 진행된 곳을 찾아 나무심기를 하는 중이다. 오른쪽은 ‘아이스크림, 노 캐시’(2025, 60.6×60.6㎝).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하나. 코카콜라, 캠벨수프, 나이키, 스누피 등에 이어 스타벅스까지 작가의 작품 속에 대놓고 등장하는 글로벌 브랜드가 말이다. 자칫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진 않을까. “오히려 그 반대다. 대중의 인식과 행동을 바꿀 만큼 세계적으로 힘을 가진 브랜드의 영향력을 내가 이용한 거다. 앞장서고, 동참하라는 메시지를 에두른 거다. 그 일례가 스타벅스다. 8∼9년 전쯤 전국 매장에 종이빨대를 전면 도입한 일을 보고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정성준의 ‘너도, 나도, 우리도 할 수 있어’(2026, 121.0×162.2㎝). 동물 친구들이 대도시 한복판 대로를 따라 시위행렬을 만들며 걷고 있다. 이들 뒤 건물 외벽에 나이키의 광고판이 보인다. 작품명에서 나이키의 메시지 ‘저스트 두 잇’을 연상할 수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18년 국내 커피 프랜차이즈 중 처음이었고 대중화를 촉발한 종이빨대였더랬다. 5년 뒤 전면시행 직전 환경부가 ‘무기한 유예’하며 없던 일이 돼 버렸지만. 비록 시행으론 못 갔어도 그 막강한 파급력을 북극·남극 가족들이 감지한 거다. 스타벅스 매장으로 얼음을 구하러 찾아왔으니. “사실 순진하고 바보 같은 행동이다. 그 얼음 덩어리가 녹는 빙하에 도움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늦었다고 오늘을 포기할 순 없다. 뭐라도 해야 하는 거고. 하나씩 모이면 바로 내일이 되지 않겠나.”
정성준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 전경. 전시장 입구에 스테인리스스틸 작품 ‘행복이 멀리 있지 않아’(2026, 80×115㎝)가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결국 작가가 구현하려던 실체가 드러났다.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적인 유토피아, ‘헤테로토피아’다. 아무리 이상한 행동이라도 실재하는 공간이라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798예술구 등 10년 중국 활동서 건진 화두 ‘환경’
미국 뉴욕 하늘 아래 서 있어야 할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로 떠내려와 있다. 어스름한 하늘에 달이 걸린, 절절한 ‘로맨틱한 뷰’가 압권인데. 작은 배를 나눠타고 이 광경을 목도한 동물들의 ‘말풍선 대화’가 단순치 않다. “와! 진짜 로맨틱한 풍경 아니야?” “근데 이게 아메리칸 드림이야?” “진정해. 사람들이 해결할 거야, 다음 회의 때.” “그런데 말이야. 우리 미래는 어디에 있지?”
작가 정성준이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에 건 3m 대작 ‘로맨틱 뷰’(2026, 227.3×291㎝) 앞에 섰다. 미국 뉴욕에 있어야 할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 한가운데 떠내려와 있는 장면은 끝내 로맨틱할 수 없는 역설의 풍경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번 개인전에 건 신작 15점 중 메인 작품(‘로맨틱 뷰’ 2026). 150호 두 점을 연결한 3m 크기의 화면은 이제껏 동물들이 만든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단순히 환경문제에 대한 경고에 그치지 않았으니까. 바로 재난상황에 뛰어들었다고 할까. “지난해 여름 폭우로 전남광주 작업실이 침수됐다. 한창 전시준비를 하며 작업하던 작품들이 물에 다 젖고 작업실이 엉망진창이 된 뒤 작심을 하고 그린 작품이다.”
정성준의 ‘로맨틱 뷰’(2026, 227.3×291㎝) 중 부분. ‘자유의 여신상’이 떠내려온 바다에 작은 배를 띄우고 풍경을 감상 중인 동물들의 ‘말풍선 대화’가 인상적이다. “진정해. 사람들이 해결할 거야, 다음 회의 때.”(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정성준의 ‘로맨틱 뷰’(2026, 227.3×291㎝) 중 부분. ‘자유의 여신상’이 떠내려온 바다에 작은 배를 띄우고 풍경을 감상 중인 동물들의 ‘말풍선 대화’가 인상적이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미래는 어디에 있지?”(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비단 이 풍경뿐일까. 어느 날 뚝딱 만들어진 작가의 작품은 하나도 없다. 20여 년 이어온 지난한 세월이 그 단면이다. 국내 서양화단에선 드물게 작가는 러시아를 거쳐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유화과에서 유학한 이력을 가졌다. 중앙미술학교 100년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수석졸업(석사과정)이란 타이틀을 기어이 따내기도 했고. 공부도 만만치 않았지만 중국 미술계 최전방인 798예술구에서 ‘한번 살아남아 보자’며 10년을 버틴 일이 더 크다. 당시 베이징의 “양치도 못할 만큼 썩은 하천”에서 ‘환경’이란 화두를 건져낸 게 우연은 아니었단 얘기다.
숱한 그룹전과 아트페어로 작품과 이름을 알렸고 그 사이사이 개인전으로는 붓의 중심을 잡았다. 2012년 첫 스타트를 끊은 이래 이번이 열 번째 개인전. 그중 절반은 중국 베이징에서 했다. 지난해 전남대 미술학과 교수로 임용된 뒤에는 교육현장에까지 투신하게 됐다. “중국 미술시장을 겪으며 세상이 넓다는 경험을 했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청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꿈을 갖는 일 말이다.” 기꺼이 현실세계 속 북극곰이 되고 황제펭귄이 되려는 건가. 불협화음의 화음, 부조화의 조화, 작가 특유의 굴절된 파노라마가 그 폭을 더 넓힐 모양이다. 전시는 10월 17일까지.
작가 정성준이 개인전 ‘다음 역은 내일입니다’에 내건 작품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2026, 107×160㎝) 앞에 섰다. 작가의 작업여정에 오래 함께한 ‘트램시리즈’ 중 하나다. 동물 친구들은 이제 유토피아를 찾는 여행을 위해서가 아닌 애써 구한 얼음을 북극으로, 남극으로 나르기 위해 트림을 기다린다. 작품은 전시장 밖 갤러리 윈도에 나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