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윤희 미술평론가] 1895년 새해 첫날 새벽. 프랑스 파리의 눅눅하고 차가운 겨울 거리에 길쭉한 포스터 한 장이 나붙었다. 실물대에 가까운 여인이 종려 잎을 든 채 비잔티움의 모자이크를 배경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누구도 본 적 없는 형식의 그림이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르네상스극장에서 주연으로 서는 연극 ‘지스몽다’(빅토리앵 사르두 희곡)를 알리는 포스터였다. 길고 우아한 실루엣의 여인이 담긴 2m가 넘는 포스터 앞에서 사람들은 넋을 잃고 멈춰 섰다. 밤이 되면 포스터를 조심스레 떼어내 집으로 가져가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체코 출신 무명 화가 알폰스 무하(1860∼1939)는 파리의 유명인물로 떠올랐다. 불과 하룻밤새의 일이었다. 새해를 앞둔 성탄절 무렵 인쇄소에서 컬러 교정을 보던 무하에게 당대 연극계의 여왕 베르나르는 시급히 포스터를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는 요청을 해왔다. 이미 공연하고 있던 ‘지스몽다’의 연장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무하는 고심하다가 정장을 빌려 입고 연극을 보러 갔다. 그리고 그 길로 한 장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이 포스터를 처음 본 인쇄업자들은 대실패작이라고 경악했다. 색이 바랜 듯 보이고 주목도가 떨어져 베르나르가 계약을 파기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포스터를 본 베르나르는 무하를 포옹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아름답군요. 이제부터 당신은 나를 위해 일하게 될 거예요.”
밤마다 떼어가는 포스터…인기와 성공 둘 다 잡아
다른 화가들이 자리를 비운 연휴의 틈에서 태어난 이 그림이 무하를 단숨에 유명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 독특한 그림에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여 ‘무하양식’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아르누보의 대명사가 됐다. 순수미술이 아닌 이른바 ‘상업미술’에서 꽃피운 재능이었다. ‘지스몽다’의 성공 이후 비스킷 상자, 향수병, 자전거 광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인의 의식주 모든 곳에 스며들었다. 세속의 상품일지언정 그가 그려냈다면 평화로운 꿈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
이후 재능을 알아본 쿠엔 벨라시 백작의 후원으로 독일 뮌헨을 거쳐 1887년 파리로 진출했지만 1889년 백작의 후원이 돌연 끊기면서 파리의 차가운 다락방에 홀로 내던져졌다. 폴 고갱과 화실을 공유하며 삶은 콩 몇 알로 끼니를 때우던 극빈 속에서도 붓을 꺾지 않았던 무하는 생계를 위해 잡지 컷과 교과서 삽화를 밤낮없이 그리며 혹독한 무명 시절을 견뎌냈다. 그 끝에 ‘지스몽다’를 통해 화려하게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객은 연극을 보기도 전에 포스터를 보고 이미 연극의 주인공을 사랑하게 됐다.
포스터 작업에 몰두하면서 무하는 자신만의 진정한 발명을 할 수 있었다. ‘장식패널’이라 불린 것이다. 아무런 문구도 적히지 않은 채 오로지 감상과 실내장식을 위해 인쇄한 이 큰 판화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아트포스터’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무하는 값비싼 원화가 아니라 누구나 벽에 걸 수 있는 그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식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그림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술을 민중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 첫 연작인 ‘사계’(1896)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네 여인에게 실어 옮겨놓은 작품이다. 봄은 흰옷을 입고 나뭇가지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며 꿈꾸는 듯한 여인으로, 여름은 붉은 양귀비를 머리에 두르고 물가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긴 여인으로 그렸다. 가을은 국화 화관을 쓰고 무르익은 포도를 따는 풍요의 화신으로, 겨울은 눈 덮인 가지 사이에서 언 새 한 마리를 두 손에 품어 녹이는 자애로운 형상으로 나타난다. 무하는 르네상스 이래 서구 미술사에서 수없이 반복돼 온 고루한 알레고리 전통을 과감히 탈피했다. 낫을 든 농부나 얼어붙은 노인의 모습 대신 님프와 같은 여인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
근대적 대량 인쇄 매체를 통해 대중의 일상 공간에 깊숙이 스며든 ‘몽상’은 미술관에 갇혀 있던 예술의 위로를 만인의 삶 속에 공유하고자 했던 무하의 예술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이 시절을 훗날 무하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응접실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예술에 몸담을 수 있어 행복했다. 값이 싸서 누구나 가질 수 있었고, 가난한 집에도 넉넉한 집에도 똑같이 자리를 얻었다.”
이런 대성공을 거뒀지만 무하는 명예에 취하기보다 새로운 꿈을 꿨다. ‘벨 에포크’(19세기 말부터 1차대전 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이 누린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절)의 중심에서 승승장구하면서도 “내 조국은 고통받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하의 조국은 여전히 합스부르크왕가의 지배 아래 자치권을 잃고 고통받고 있었다.
소수 응접실 넘어 세계 미술관으로…‘복제’로 평등
결국 무하는 유럽의 성공을 뒤로하고 미국에서 6년 정도 머무른 뒤 1910년 체코로 영구 귀국했다. 예술이 제아무리 화려한들 ‘내 조국이 도랑물로 목을 축이도록 버려둔다면 아무 뜻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고국에 돌아온 무하는 민족의 역사를 ‘슬라브 서사시’(1910∼1928)로 남겼다. 20점 대작에 20년 남짓 걸린 기념비적인 역사화 연작이었다. 그 사이 합스부르크제국이 무너지고 새로 태어난 신생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앞에 무하는 첫 지폐와 우표, 국장을 아무 대가 없이 그려 바쳤다.
그러나 고국에서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르러 무하양식은 낡은 것으로 치부됐고 부상하는 파시즘은 슬라브 민족주의를 ‘반동’으로 몰아세웠다. 1939년 3월 독일군이 프라하로 진주한 뒤 가장 먼저 붙잡힌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일흔여덟 살의 무하였다.
|
인간 보편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고 자신을 길러 준 조국을 사랑했던 예술가의 최후조차 독재자의 협박에 스러질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무하가 살아낸 시대의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무하의 예술은 부서지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것이 유일무이한 원화가 아니라 무수한 복제였던 까닭에 지금도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장식품으로 흩어져 있다. 누구나 쉽게 만나고 오래 바라볼 수 있으니 예술을 소수의 응접실이 아니라 만인에게 돌려주려 했던 무하의 오랜 소망은 그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온전히 이뤄졌다.

![단 한 장의 '포스터'로 단 하룻밤새 '스타작가' [화폭역정 24]](https://image.edaily.co.kr/images/photo/files/NP/S/2026/08/PS26082100232.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