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異야기]①서른에 창업…기술 개발·해외진출로 위기 극복

박형수 기자I 2018.07.03 14:40:32

노은식 디케이락 대표, IMF 당시 고객사 늘어 매출 3배 증가 발판
2000년 들어 스테인리스 제품 개발과 해외 진출 시동
해외 비중이 국내보다 높은 수출 기업으로 성장

노은식 디케이락 대표
[이데일리 박형수 기자] 업력 32년을 자랑하는 계장용 피팅과 밸브 개발업체 디케이락(105740)은 김해 골든루트 일반산업 단지에 있다. 피팅과 밸브는 조선, 해양 플랜트, 원자력, 화력, 수력 발전설비, 압축천연가스(CNG) 및 수소용 자동차 산업, 해외 정유시설 대형 플랜트 등에 들어가는 핵심부품 가운데 하나다. 디케이락은 유럽, 중동,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 46개국에 92개 대리점을 갖추고 해외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 세계 최대 석유회사 엑슨모빌(Exxon Mobil)과 세계 최대 가스 생산업체 가즈프롬(Gazprom) 등에 제품을 공급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디케이락을 창업한 노은식 대표이사는 ‘이립(而立)’ 서른이 되던 지난 1986년 ‘대광닛불상사’를 설립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창업했다고 볼 수 있지만 노 대표는 이미 볼트와 닛불(니플) 업계에서 17년간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경남 함양에서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노 대표는 부산에서 공부하는 형과 누나 대신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을 도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농사를 지었다. ‘사람은 공부를 해야한다’는 형님의 말에 따라 부산으로 유학을 갔고 동아중학교를 거쳐 건국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학업에만 열중할 수는 없었다. 낮에 일하고 야간에 학업을 병행했다. 당시 볼트와 닛불을 판매하는 일을 했다.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공장에서 볼트와 닛불을 만들었다.

노은식 대표는 “부산 국제시장에 미군이 쓰던 볼트와 닛불이 많았다”며 “수입에 의존하던 부품을 국산화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품질은 형편없었다”고 회상했다.

국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주요 부속품을 국산화하는 업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 대표는 자신만의 브랜드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사업을 해야 된다고 판단하고 500만원 자본금을 가지고 30평 규모의 천막 공장을 세웠다.

그는 “가격이 저렴한 볼트보다 피팅과 밸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창업 초기에는 1억원을 버는 것이 목표였는 데 예상보다 빨리 목표를 이뤘다”고 말했다.

창업 초기 오전 7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일하기를 밥 먹듯이 했던 노 대표를 신뢰하는 거래처가 늘었다. 1991년 대광닛불(주)로 법인 전환했다. 1996년에는 부산 사상에 새 공장을 짓고 이전했다. 1997년 찾아온 국제 통화 기금(IMF)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였다. 노 대표는 “당시 제품을 납품하고도 미수금을 회수하지 못한 기업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다”면서도 “당시 이름있던 피팅업체가 줄도산하면서 더 많은 고객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가 장비를 중고로 싸게 살 수 있었다”며 “창업 초기부터 지켜왔던 원칙 덕분에 외환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노 대표는 자금 투명성에 대해선 사업 초기부터 양보하지 않았다. 빌린 돈은 제날짜에 정확하게 갚았고 받아야 할 돈도 마찬가지였다. 외상 거래도 고정 거래처에 한해서만 허용했다. 그는 “매출액은 1997년 30억원에서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100억원대로 뛰었다”며 “IMF로 피팅·밸브 업계 구조조정이 있었고 살아남은 디케이락은 정식 협력업체로 등록할 수 있었다”고 했다.

매출액이 안정적으로 100억원대로 접어들면서 노 대표는 철로 만들었던 피팅, 밸브제품을 고압, 고열에 잘 견디는 스테인리스 제품으로 개선했다. 정밀한 기술을 요구하는 만큼 부가가치가 높았다. 외국에서 기술 고문을 초청할 정도로 노 대표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전사 역량을 집중했다.

기술 개발과 함께 꾸준하게 해외 시장도 노크했다. 수출하는 데 필요한 각종 인증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 대리점은 수출매니저가 밀착영업을 통해 들어온 상품 혹은 기술 질의 사항에 대해서 24시간 내에 고객에게 응답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다국적 기업에 자사 브랜드인 ‘DK-락(Lok)’으로 공급하고 있다. 수출 비중은 지난해 기준 약 62%로 국내 매출 비중을 웃돌고 있다.

최근 수년간 국제 유가 하락과 글로벌 경기 침체로 피팅업계가 고전하는 동안에도 디케이락은 ‘3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올해는 4000만달러 이상 수출실적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 대표의 또 다른 경영 신념 가운데 하나는 직원 복지다. 임직원이 가장 큰 자산이라 생각하는 노 대표는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모든 직원에게 자기계발을 할 기회를 주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본사 인근에 자가 연수원을 운용하며 자유롭게 교육과 여가 활용 장소로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효율적인 직원 출퇴근과 근무 집중력을 위해 총 7대의 통근버스를 운영하고 있고 원거리 통근 직원을 위한 기숙사도 운영 중이다. 출산장려금, 자녀 학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직원 본인이 학업을 희망하면 대학교와 대학원 학자금을 전액 지원하고 있다.

노 대표는 “회사는 대표 혼자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다”면서 “도움을 받았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직원·지역과 함께 어울리며 나눠야 기업이 자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신념에 따라 사회 공헌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수년 전 네팔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다녀온 노 대표는 엄홍길 휴먼재단에서 건립한 ‘4차 휴먼스쿨’을 방문했다. 그는 “네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맑은 미소를 보았다”며 “아이들이 험난한 길을 3~4시간씩 걸어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네팔 고리지역에 디케이락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짓고 싶었다”고 말했다.

디케이락 임직원들도 노 대표의 뜻을 존중해 학교 건립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엄홍길 휴먼재단과 함께 1년 넘게 준비해 420여명의 초·중·고등학생이 험난한 길을 걷지 않아도 교실에 앉아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학교를 건립했다. 노 대표는 “학교를 설립만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며 “앞으로도 교사 급여와 아이들의 학용품 등 각종 지원을 지속적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은식 대표이사는…

△경남 함양 출생 △부산디지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동아대 MBA석사 △동의대학교 글로벌 경영학과 박사 △1986년 대광닛불상사 설립 △2010년 1월 디케이락 상호변경 △2010년 11월 코스닥 상장 △2015년 중소기업청 월드 클래스 300 기업 선정

◇용어설명

피팅은 배관을 수평, 수직으로 연결해 주는 장치로 유체의 종류, 온도, 압력에 제한성이 거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밸브 유체의 흐름을 조절하고 여닫는 장치로 유체 차단·방향전환·역류방지·고압보호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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