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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것은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대출 이자를 감당할 길이 없어진 A씨는 어떻게든 수입을 만들려고 당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찾았습니다. ‘귀금속 전달 업무, 건당 수수료 지급’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정된 사람에게 물건을 받아 다른 곳에 전달하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찜찜한 마음에 “혹시 불법적인 일은 아니냐”고 물었더니 “정식 업체의 배송 대행”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며칠 일을 하던 어느 날 A씨는 경찰의 출석요구를 받았습니다. 그가 전달한 귀금속은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은 피해자가 지시받고 구매한 것이었습니다. 사기 피해자였던 그는 여섯 달 만에 사기 피의자가 됐습니다.
-리딩방의 ‘애널리스트’를 고소하고 싶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가짜일 텐데 잡을 수 있나요. 어차피 못 잡을 거면 고소가 의미가 있나요.
△이름을 몰라도 고소할 수 있습니다. 성명불상자를 상대로 고소장을 내면 수사기관이 QR코드 유포 경로, 오픈채팅방 개설 정보, 입금 계좌, 가짜 앱의 서버를 따라 신원을 추적합니다. 다만 기대치는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총책은 대부분 해외에 있고 검거되는 것은 국내 하부 조직원인 경우가 많으며 피해금은 입금 즉시 쪼개져 이동하기 때문에 전액 회수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고소는 반드시, 그리고 빨리 해야 합니다. 계좌에 잔금이 남아 있다면 지급정지가 유일한 직접 회수 수단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소장은 B씨가 사기 조직에 속아 전 재산을 잃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수사기관의 공적 기록으로 만들어 줍니다. 뒤에 이어질 또 하나의 사건에서 이 기록이 B씨 자신을 지키는 자료가 됩니다. 시점이 중요합니다. 피의자로 입건된 뒤에 부랴부랴 낸 고소장은 방어용으로 급조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지만, 피해 직후 자발적으로 낸 고소장은 그 자체로 진정성을 증명합니다. 사기를 당했다면 부끄러워 미룰 일이 아니라 즉시 고소부터 해 두는 것이 훗날의 자신을 위한 보험이 되는 셈입니다.
-저는 물건을 전달만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사기 피의자인가요.
△조직이 왜 하필 귀금속이었는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계좌로 돈을 받으면 피해자 신고 즉시 지급정지가 걸립니다. 그래서 요즘 조직은 피해자에게 현금이나 금붙이를 직접 건네게 하거나 귀금속을 사서 전달하게 하고 이를 받아 나르는 사람을 구인 앱에서 모집합니다. 전달책은 본인 생각과 달리 심부름꾼이 아니라 편취 행위를 완성하는 마지막 고리입니다. 대법원은 범행의 전모를 구체적으로 몰랐더라도 피해자의 재산을 수거해 전달한다는 인식이 미필적으로라도 있었다면 사기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봅니다. 방조를 넘어 공동정범으로 인정된 판결도 있고, 여러 피해자의 돈이 합쳐져 편취액이 5억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대상이 됩니다.
-저는 ‘불법 아니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습니다. 그 카톡이 남아 있으니 무죄가 되는 것 아닌가요.
△그 대화는 방패가 될 수도, 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사기관은 그 질문을 거꾸로 읽습니다. ‘이상하다고 느꼈으면서도 계속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실제로 의심을 품었던 정황이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는 근거로 쓰인 판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답을 믿을 만했다는 사정까지 함께 소명해야 합니다. 상대가 업체 등록증을 보여줬는지, 설명이 구체적이었는지, 보수가 업무에 비해 과도하지 않았는지 같은 것들입니다. 법원도 정상적인 채용 경위와 대면 면접 여부, 보수 수준, 피고인의 나이와 사회 경험을 종합해 고의를 판단합니다. 2024년 대법원은 구인사이트를 통해 정상적으로 지원했고 일당 13만원이 지나치게 높지 않았던 10대 수거책에게 무죄를 확정하기도 했습니다(대법원 2024. 7. 31. 선고 2024도9087 판결). 실무적으로 가장 중요한 당부는 대화 내역을 통째로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유리한 부분만 골라 내면 오히려 신빙성을 의심받습니다. 그리고 이상함을 인지한 시점 이후에도 일을 계속했는지가 유무죄의 갈림길이 되는 만큼, 지금 즉시 모든 연락을 끊고 수사에 협조해야 합니다. 앞서 제때 내 둔 고소장은 이때 힘을 발휘합니다. 본인 역시 같은 유형의 조직에 속아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피의자가 되기 전부터 존재한 객관적 기록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형사 처벌만 무서운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귀금속을 전달한 그 피해자가 저에게 돈을 물어내라고 할 수도 있나요.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분들이 놓치는 두 번째 전선입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조직뿐 아니라 전달책 개인을 상대로도 공동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조직은 어차피 잡히지 않으니 현실적으로 소송은 이름과 주소가 확인되는 전달책에게 들어옵니다. 유죄가 확정되면 민사소송에서 편취금 전액이나 과실 비율에 따라 배상할 위험이 있고, 민사는 형사보다 문턱이 낮다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 형사에서는 고의가 증명돼야 하지만 민사 법원은 부주의하게 범행에 이용된 과실만으로도 방조에 의한 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사까지 내다보면 결론은 하나로 모입니다. 형사 단계에서 무혐의나 불기소 처분을 받아내는 것이 민사 방어의 사실상 승부처입니다. 수사기관이 기록을 검토해 혐의 없음을 인정한 처분은 민사 재판부에 제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료이고 반대로 유죄 판결문은 그대로 배상 판결의 근거가 됩니다. 수사 초기에 소명 자료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내느냐가 형사와 민사 두 사건의 운명을 동시에 가르는 겁니다.
-사기로 진 빚에 형사와 민사까지 겹쳤습니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하나요.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형사입니다. 고소인으로서, 또 피의자로서 소명 자료를 정리해 초기에 내야 합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형사 결과가 민사 방어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채무 정리는 병행해서 준비합니다. 리딩방 사기로 생긴 대출은 본인의 낭비로 만든 빚이 아니어서 개인회생·파산 절차에서 불리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전달책 사건에서 유죄가 확정돼 배상 책임을 지게 되면, 그 채무는 고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채무로 분류돼 회생·파산을 거쳐도 면책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채무자회생법 제566조). 형사 사건의 결과가 삶을 다시 세우는 출구까지 좌우하는 셈입니다.
이 사건의 본질은 한 번 무너진 사람을 조직이 다시 노린다는 데 있습니다. 사기를 당해 급전이 필요해진 사람들의 절박함은 조직에게 가장 좋은 채용 조건입니다. 기억할 신호는 세 가지입니다. 면접 없이 메신저로만 지시하는 알바, 현금이나 귀금속을 직접 만지는 알바, 일에 비해 보수가 이상하게 높은 알바. 그리고 하나 더, 물어봤다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답이 이상하면 그 자리에서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해당 일을 했다면 수사 단계부터 적극 대응하고 수사기관 입장에서도 2024년 대법원 판결 등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법리적으로도 적극 소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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