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조의연)는 8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국고손실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 전 청장에 대해 “국정원의 의도를 알고 해외 조사를 지시했다는 증거가 부족하고 공여자 진술을 신뢰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정원에서 이 전 청장에게 정치적 의도를 알려줬다는 증거가 없다”며 “따라서 정치적 의도를 구체적으로 인식해 국고손실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서도 “공여자인 원 전 원장과 김승연 전 대북공작국장의 진술이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고 결론 냈다.
이 전 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재판을 지켜보던 가족들과 지인들은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난 2월 구속돼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이어온 이 전 청장은 무죄 판결로 즉시 석방됐다. 그는 석방 후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준비된 차량을 타고 법원 청사를 떠났다.
변호인은 취재진과 만나 “사필귀정으로 결론이 난 것 같다”며 “진실을 밝혀주신 재판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충분히 준비해서 항소심에서도 항소기각 판결을 받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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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국세청 스스로 액수를 정해 국정원에 자금을 요청해 자금을 전달받아 해외 정보원에게 은밀한 방법으로 직접 건네는 등 불법공작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이 확인됐다”며 “국고손실 고의가 없다거나 기능적 행위지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뇌물수수 부분에 대해서도 “공여자들은 검찰 수사 이래 법정에 이르기까지 뇌물 혐의에 부합하는 증언을 일관되게 유지했다”며 “이 전 청장의 부인 진술을 믿고 공여자들의 진술을 배척한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 전 청장은 국세청장 재직 시 ‘김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을 추적해달라’는 원 전 국정원장의 요구를 받고 용도가 극히 제한된 국정원 대북공작금 10억원 가량을 사용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그는 아울러 원 전 원장에게 이 같은 공작에 대한 활동비 명목으로 1억2000만원의 뒷돈을 수수한 혐의도 받았다.
국정원이 이른바 ‘데이비슨 사업’이라고 명명했던 김 전 대통령 해외 비자금 추적 공작은 2010년 5월 시작됐다. 당시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앞두고 이들에 대한 추모 열기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원 전 원장은 2011년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풍문을 확인하기 위한 정치공작에 착수했다. 당시 풍문 내용은 바다이야기 사건 해외도피사범이 노 전 대통령 측근에게 금품을 제공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원 전 원장은 해외도피사범의 국내 송환을 위한 공작활동을 ‘연어사업’이라고 지칭하고 여기에도 대북공작금 8만5000달러를 사용했다. 이 같은 공작은 김대중·노무현 전 두 전직 대통령의 도덕성에 흠결을 내 추모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대북공작금까지 동원한 공작에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풍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전 청장은 법정에서 이 같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지만 검찰은 지난달 27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에 벌금 2억4000만원을 구형했다. 검찰은 이 전 청장에 대해 “국정원이 의도를 갖고 김 전 대통령 비자금을 파헤치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을 것임에도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하며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