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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이 흐른 어느 날 법원에서 소장이 날아왔습니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대부업체가 아버지의 빚 4000만원을 자식들이 갚으라고 독촉한 것입니다. 폐업 무렵 받은 대출은 연체 이자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습니다.
당황한 A씨가 상속포기를 알아보니 이미 ‘상속 개시를 안 날부터 3개월’이 지났다는 절망적인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지인은 “그러면 한정승인(상속인이 상속으로 취득하게 될 재산의 한도에서 피상속인의 채무와 유증을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속을 승인하려는 의사표시)이라도 해 두라”고 조언했습니다.
-상속포기 기간이 지났다는데, 꼼짝없이 아버지 빚을 다 떠안아야 하나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원칙적으로 상속인은 상속 개시를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단순승인, 한정승인, 상속포기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아무 조치도 하지 않으면 빚까지 고스란히 물려받는 ‘단순승인’으로 간주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빚이 재산보다 많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몰랐다면 그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다시 한정승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특별한정승인’이라 부릅니다. 소장을 받고서야 빚의 존재를 알았다면 소장을 받은 날부터 3개월의 시계가 다시 도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통장을 정리해 장례비로 쓰고 차량을 처분한 행위는 ‘상속재산 처분’으로 간주되어 단순승인으로 처리될 위험이 있습니다. 장례비 지출은 다툴 여지가 있으나 차량 처분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처분 경위와 대금 사용처를 꼼꼼히 소명할 준비를 해두어야 합니다.
-애초에 상속포기를 했더라면 더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을까요?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상속포기는 A씨 개인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 빚 자체를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A씨 형제가 모두 상속을 포기하면 그 빚은 다음 순위 상속인, 즉 아버지의 형제나 조카들에게 넘어갑니다. 그들 역시 3개월 안에 포기하지 않으면 무심코 빚을 떠안게 됩니다. 친척들에게 ‘빚 폭탄’을 돌리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산이 조금이라도 있고 후순위 상속인이 존재한다면 처음부터 한정승인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려받은 재산 범위 내에서만 빚을 갚으면 되므로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지 않고 A씨 선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A씨에게 남은 최선의 길 역시 한정승인이니 애초에 틀린 방향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원에 한정승인 신청만 해두면 모든 게 끝나는 건가요?
△가장 흔하면서도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한정승인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는 단지 ‘물려받은 재산 한도 내에서만 갚겠다’는 선언일 뿐이며 그 재산을 채권자들에게 실제로 나누어주는 청산 절차가 뒤따라야만 진정한 매듭이 지어집니다. 채권자들에게 신고하라고 공고하고 신고된 비율대로 배당하며 시골 집 같은 재산은 매각이나 상속재산파산을 통해 정리해야 합니다.
이를 모른 채 법원 결정문만 서랍에 넣어두면 몇 년 뒤 다른 채권자가 ‘왜 내 빚은 갚지 않았느냐’며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자칫 한정승인의 보호막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법률 전문가들조차 신청서를 내고 결정문을 받는 데서 업무를 멈추며 청산의 필요성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동산을 직접 팔아서 채권자들에게 나눠주라니 막막합니다. 그런 일은 해본 적도 없는데요.
△그래서 존재하는 제도가 바로 ‘상속재산파산’입니다. 한정승인을 한 상속인이 상속재산에 대해 파산을 신청하면 법원이 파산관재인을 선임해 재산을 조사하고 처분하여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배당해줍니다. C씨가 직접 공고와 배당, 매각을 챙겨야 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훗날 ‘배당이 잘못됐다’며 책임을 질 위험도 없습니다. 특히 부동산이 포함되어 있어 세금과 처분 절차가 복잡하게 얽힌 경우라면 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꼭 알아두어야 할 유용한 길입니다.
재산보다 빚을 물려받는 상속이 늘어나는 시대입니다. 노년의 생활비 대출과 폐업 후에도 남은 가게 빚, 어쩔 수 없이 섰던 보증 채무가 고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유족의 삶을 짓누릅니다. 사망신고 시 금융재산과 채무를 한 번에 조회해 주는 안심상속 서비스가 도입되었지만, 정작 그다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기한과 선택지, 그리고 한정승인 이후의 청산 절차까지 창구에서 종이 한 장으로라도 안내해 주는 세심함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끄는 만화 ‘체인소 맨’의 주인공 덴지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빚을 영문도 모른 채 떠안고 이를 갚기 위해 목숨 걸고 악마를 사냥하는 소년으로 자라납니다. 슬프게도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부모의 빚이 남은 자식의 삶마저 삼키지 않도록, 고인의 통장을 정리하기 전 반드시 빚의 유무부터 확인하고 석 달의 시계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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