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쳐라.” 올해 수능 필적 확인 문구는 시인 곽의영(69)의 시 ‘하나뿐인 예쁜 딸아’에서 발췌했다.
지난달 14일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치러진 1282곳의 전국 시험장. 52만2670명의 응시생이 일제히 적은 시구(詩句)다. 수험생들은 국어·수학·영어 등 매 영역 시작 때마다 이 문구를 컴퓨터 사인펜을 사용해 답안지에 정자로 따라 적어야 했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 이 문구는 수험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였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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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의영 시인은 최근 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인용 시구는 2018년에 딸 아이 대학 졸업식 때 쓴 시”라며 “서른 세살 아들이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떠나간 뒤 더 귀한 딸이다. 그날 너무 예뻐서 쓴 시”라고 웃었다.
그는 “수능 당일 오전 11시께 돼서야 (필적 확인 문구에 인용된 줄) 나중에 알았다”며 “운영 중인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하나뿐인 예쁜 딸아’ 글귀에 댓글 알림이 와 뒤늦게 알았다. 한 수험생 부모가 ‘고맙다’는 댓글을 달았더라. 감사할 따름이다. 가족들도 무척 기뻐했다”고 말했다.
곽 작가는 늦깎이 시인이다. 필적 문구에 인용된 시구가 담긴 시집 ‘노을에 배 띄워놓고’(청어)도 그의 첫 책이다. 도서출판 청어에서 2023년 9월 ‘청어시인선’ 405번째 시집으로 펴냈다.
개인적으로 시를 써오다가 소셜미디어(SNS)로 인연이 된 이윤정 시인에게 시 창작법을 알음알음 배웠고, 2017년 5월 한양문학 시조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정식 등단했다. 이듬해 한양문학에서 시 부문 신인문학상도 받았다.
이윤정 시인은 그의 첫 시집 서평을 통해 “시인은 비유나 상상의 시작 대상을 먼 곳에서 가져오지 않고 일상의 삶에서 기발하고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다”며 “필요 이상의 수식이나 억지, 가장이 없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적었다.
늦깎이 시인으로 문단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거주하는 대구 지역은 물론 인터넷상에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이고, 대구문인협회, 달성문인협회 회원이다. 대구 달성에서 태어나 현재도 이곳에 거주 중인 곽 시인은 “나이가 있는 만큼 지금은 전업 작가가 됐다. 자전거를 타며 주변을 둘러보고 시상을 떠올리는 편이다. 2, 3년 내 두 번째 시집을 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요즘 쓰는 글 역시 가족과 삶에 대한 시들이다.
곽 시인은 고사장에서 자신의 시구를 여러 차례 곱씹었을 수험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제 시구처럼 ‘저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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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 확인 문구는 수험생들의 대리응시 등 부정행위를 막기 위한 제도다. 지난 2005학년 수능에서 대규모 부정행위가 적발된 후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이듬해부터 도입했다. 수험생이 자필을 기재해 사후 문제 발생 시 본인 확인용으로 사용하는 취지다.
그간 나태주, 김남조, 한용운 등 유명 시인의 시구를 인용해오다, 지난해부터는 문단에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의 시구를 발췌해 시인 발견의 장으로 떠오른 모양새다. 지난해 수능에선 양광모 시인의 시 ‘가장 넓은 길’의 한 구절인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가 인용됐는데 이후 양 시인은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통상 국내 작가의 문학작품 가운데 적절한 문구를 수능 출제위원들이 골라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수험생들의 필적을 가려내기 위한 목적인 만큼, 문장 길이는 12~19자 사이여야 하고 ‘ㄻ’ ‘ㄾ’ ‘ㅀ’ 등 겹받침과 ‘ㄹ’ ‘ㅁ’ ‘ㅂ’ 등 세 자음 가운데 2개 이상이 반드시 문구에 포함돼야 한다.
가급적 수험생에 미치는 정서적 영향도 고려해 문구를 고른다. 수험생이 답안지를 받은 뒤 가장 먼저 기재하는 것이 필적 확인 문구인 만큼, 수험생을 응원하거나 희망을 북돋는 내용이 채택되는 경향이 짙다.
역대 가장 많이 인용된 시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로 지금까지 총 3차례 나왔다.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 구절은 첫해인 2006학년도와 2017학년도에 각각 사용됐다. 같은 시의 첫 구절인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2007학년도에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