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원전 8기 추진’이라는 방향에는 동의하면서도 1200억달러를 합의문에 못 박지 않으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괄적 프레임워크에는 협력 목표만 담고 실제 투자는 원전별 사업성과 한국 기업의 참여 조건을 따져 결정하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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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안액을 원전 8기로 나누면 한 기당 150억달러다. 하지만 아직 어느 지역에 어떤 원전을 지을지, 누가 건설·운영할지, 생산한 전력을 누가 얼마에 사갈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사업성을 판단할 핵심 조건이 빠진 상태에서 투자 총액부터 제시된 셈이다.
한미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는 원금과 약정이자를 갚을 만큼 충분한 현금흐름을 낼 수 있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사업’만 투자 대상으로 삼도록 규정한다. 원전 8기에 1200억달러를 미리 배정하면 개별 사업의 상업성을 검토하더라도 약속한 투자 규모에 맞춰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질 수 있다.
어떤 원자로를 적용하고 누가 사업을 주도할지도 핵심 쟁점이다. 미국은 자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인증과 현지 건설 실적이 있는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을 선호한다. 금융기관과 전력회사로서도 인허가와 건설 경험이 있는 원자로를 반복해서 짓는 편이 부담이 작다.
AP1000을 적용하면 웨스팅하우스가 설계와 원자로 공급을 맡고 한국 기업은 시공과 기자재 납품을 담당할 가능성이 크다. 두산에너빌리티와 국내 건설사에는 일감이 돌아갈 수 있지만 한국수력원자력이 주계약자나 공동 사업주로 참여하고 운영·정비 등 장기 수익사업까지 맡을지는 불투명하다.
한국형 APR1400은 국내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건설·운영 실적을 쌓았고 미국 NRC 설계인증도 받았다. 다만 미국 내 건설 실적과 공급망이 없어 부지별 인허가와 현지 시공체계를 새로 갖춰야 한다. 이 사안에 정통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1200억달러를 부담하면서도 미국 원자로를 짓는 시공사나 기자재 공급사에 머물 수 있다‘며 ”투자 규모에 상응하는 의사결정 참여 장치와 국내 기업의 수주 물량, 한수원의 운영·정비 참여를 계약에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사 지연과 비용 초과의 책임도 난제로 꼽힌다. AP1000을 적용한 미국 보글 원전 3·4호기는 완공이 계획보다 수년 늦어지고 사업비도 크게 불어났다. 같은 노형의 V.C.서머 원전 2·3호기는 약 90억달러를 투입한 뒤 2017년 공사가 중단됐다.
대형 원전은 최종 투자 결정부터 상업운전까지 10년 이상 걸릴 수 있다. 그사이 금리와 원자재·인건비가 오르고 공사가 늦어지면 금융비용도 늘어난다. 프로젝트 지분을 보유하면 장기 수익과 함께 사업 손실도 부담한다. 고정가격으로 건설을 맡으면 비용 초과 위험이 국내 시공사에 넘어올 수 있다. 또 다른 원전 관계자는 ”개별 계약에는 공사 지연과 비용 증가의 책임 범위, 추가 자금 투입 의무와 손실 분담 원칙을 명확히 담아야 한다“며 ”미국 정부의 금융 지원과 현지 전력회사의 장기 전력구매계약을 얼마나 확보할지도 사업성을 좌우한다“고 지적했다.
원전 쏠리면 리스크 풀링도 한계
대미투자에 원전이 상당부분 차지할 경우 재원 쏠림도 부담이 될 전망이다. 원전에 1200억달러를 배정하면 다른 사업에 활용할 수 있는 금액은 800억달러로 줄어든다. 미국의 원전 투자 요구액과 대미투자 1호인 텍사스 엔시날 가스복합발전소의 전체 사업비 223억달러를 단순 합산하면 1423억달러로, 대미투자 2000억달러의 71.2%에 달한다. 원전과 가스발전이 대미투자의 큰 축으로 떠오르면서 탄소포집·저장(CCUS), 반도체, 핵심광물,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등 후속 사업에 배분할 재원이 빠듯해질 가능성은 커졌다.
정부는 미국과 협상을 통해 개별 사업의 수익을 우산형 투자 특수목적법인(I-SPV)에 모아 전체 원리금 회수에 활용하는 ’리스크 풀링‘ 구조를 유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엔시날이 돈을 벌고 원전이나 CCUS 사업의 투자금 회수가 늦어지면 엔시날 수익으로 전체 회수 부족분을 보완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요구대로 원전이 전체 투자액의 60%를 차지하면 위험 분산 효과도 제한될 수 있다. 원전 여러 기의 공사가 동시에 늦어지거나 사업비가 급증하면 다른 프로젝트의 수익만으로 부족분을 채우기 어렵다. 이 사안에 정통한 전문가는 ”원전 8기의 투자 규모와 사업 주도권, 비용 초과 책임을 개별 계약에서 촘촘히 설계해야 합리적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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