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이승현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 기소된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이 ‘피고인’으로서 방어권을 주장하며 법원에 보석(保釋)을 청구하면서 보석 기준과 조건 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형사소송법상 보석은 보증금을 납부하고, 도주하거나 기타 일정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이것을 몰수하는 조건으로 법원이 구속된 피고인을 석방시키는 제도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1993년 보석 제도에 대해 “헌법 정신에 기반한 불구속 재판 원칙과 무죄 추정 원칙을 구현하고 피고인이 자유로운 신체활동을 통한 가정적·사회적 등 모든 면에서 행복추구권을 실현하도록 하고 증거수집 등 충분한 재판 준비를 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양 전 원장 측이 강조했듯 피고인이 대등한 입장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이런 대원칙에도 불구하고 법조계에선 보석 허가 여부와 관련, 법관 재량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 명확한 기준을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우선 피고인 등이 보석을 청구한 경우 몇 가지 예외 사유가 없다면 보석을 허가하도록 규정(형사소송법 95조)하고 있다. 보석 허가 제외 사유에는 △사형·무기 또는 징역 10년이 넘는 징역·금고형 △누범이나 상습범 △죄증(범죄 증거)을 인멸하거나 인멸할 염려 △도망하거나 도망의 염려 △주거 불분명 △피해자나 그 친족의 생명·신체·재산에 해를 가하거나 그렇게 할 염려 등이 있다. 이 같은 사유가 없다면 보석을 필요적으로 하가라하는 게 원칙이다.
같은 법 96조를 보면 피고인에게 이러한 제외 사유가 있어도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법관은 직권이나 청구에 의해 보석을 허가할 수 있다. ‘상당한 이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결정은 결국 법관 판단에 달린 셈이다.
대표적인 게 법관 재량에 속하는 임의적 보석인 ‘병 보석’이다. 다만 당장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건강상태가 위급해야 한다. 형사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합의금(손해배상금) 등을 공탁한 것도 보석 허가를 가능케 하는 상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양 전 원장 측은 보석청구서에서 “도주나 증거 인멸, 주거 불분명 등 법적 예외 사유가 없다며 방어권 보장을 위한 필요적 보석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1심에서 징역 15년형을 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제외 사유가 있지만 수면무호흡증 등 9개의 질병으로 ‘돌연사’ 위험이 있다며 병 보석을 요청한 상태다.
법적 요건과 함께 재판 진행 경과, 피고인 상황·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구속 당시와 비교해 특별한 사정 변경이 있는지도 중요한 기준이다. 이런 까닭에 일정한 기준을 잣대로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실제 4300억원대 탈세·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중근(79) 부영그룹 회장은 지난해 7월 건강상 문제로 보석 허가를 받았다. 반면 김기춘(80)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경우 2017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1심 재판에 이어 지난해 11월 화이트 리스트 사건 항소심에서도 건강 악화를 이유로 보석을 청구했지만 모두 기각당했다.
보석의 활용 범위는 법 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법원은 영·미권 국가와 달리 보석에 대해 엄격한 편이다. 2018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구속 기소 5만3555명 중 보석 청구 인원은 약 11.4%인 6079명이었다. 이 가운데 실제 보석이 인용된 자는 2204명으로 36.3%에 그쳤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거액의 돈을 내고 풀려나는 보석 제도는 부유층에 대한 특혜로 비춰질 수도 있다”며 “일반 국민들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하고 특혜 시비가 일지 않도록 명확한 기준 제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