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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에서 한정식집을 운영하는 정모(54)씨는 올 겨울이 유난히 혹독하게 느껴진다. 연말마다 북새통이던 대기업과 관공서 직원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2~3배 많던 연말 매출은 반 토막이 났고 인근 식당에서 2만 9900원짜리 한정식 메뉴까지 내놓자 그마저 오던 손님들도 줄었다. 정씨는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소비 심리까지 얼어붙었다”며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부정청탁을 없애고 접대 문화를 바꾸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김영란법’이 5일로 시행 100일차를 맞으면서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여가 시간이 늘어난 직장인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됐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요식·화훼업계는 불경기에 엎친 데 덮친 격이어서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직장인·공무원들 “잃었던 저녁 되찾은 기분”
초반 일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대다수 직장인들은 만족스럽다는 반응이다.
대기업 건설사 홍보팀에 근무하는 최모(32)씨는 “점심·저녁으로 술자리에 참석하는 게 주요 업무 중 하나였는데 하루아침에 업무가 사라진 기분이 들어 어색했다”면서도 “헬스클럽도 등록하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사는 맛’이 난다”고 말했다.
긍정적은 변화의 바람은 공직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외국어와 자격증 공부 등 자기계발에 한창인 공무원들이 늘어나고 골프 접대도 자취를 감췄다. 한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는 “주말마다 이어지던 골프 행사가 줄어 대학원 공부를 생각 중”이라고 귀띔했다.
이런 반응은 조사로도 확인된다. 한국행정연구원이 한국리서치와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35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5.0%는 부조리·부패 해소 등 긍정적 효과가 부작용보다 더 크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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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요식·화훼업계 측은 식사 대접과 축·조의금 상한선 탓에 가뜩이나 어려운데 허리띠를 더 졸라매게 생겼다며 울상이다.
특히 인사철과 경조사 때 축하난이나 화환을 보내는 관행이 사라진 화훼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화훼협회 관계자는 “꽃은 축재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닌데 왜 규제 대상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화초와 농·축산물 등은 규제 대상에서 빠지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서울 서초구 고속터미널 인근의 K꽃집은 ‘꽃꽂이 교실’이나 가정용 크리스마스트리 등을 개발해 연말 수입이 쏠쏠했다. 이 업체 대표 김모씨는 “경조사 화환 판매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늘어난 여가를 활용한 상품 개발에 나선 결과 상당 부분 떨어진 매출을 메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시행 100일을 맞는 만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각계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에 만연한 뒷거래를 걷어내기 위해서라도 김영란법은 반드시 정착해야 한다”면서도 “규제 대상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집행 강도에 따라 피해 규모가 달라질 수 있어 정부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시행 성과와 영향을 점검하고, 농·축·수산물 등 종합적인 소비촉진방안을 이달 중에 내놓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