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변수는 3500억달러 바깥쪽이다. 미국이 반도체 관세를 지렛대로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에 추가적인 현지 생산 확대를 요구하면서 기업 직접투자가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국내 기업의 자체 투자는 한미가 합의한 3500억달러와 별도인 만큼 추가 증설이 현실화하면 한국 경제 전체가 부담하는 대미투자 규모는 ‘3500억달러+α’로 커질 수 있다. 일본보다 대미투자 부담을 낮춰 경제·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려던 당초 협상 전략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한국이 지난해 미국과 관세협상을 타결하면서 약속한 대미투자는 총 3500억달러다. 2000억달러 규모 전략투자와 1500억달러 규모 조선협력으로 구성된다. 일본이 미국과 합의한 5500억달러보다 2000억달러 적다.
당시 정부는 일본과 한국의 경제 규모가 다른 만큼 동일한 수준의 투자 부담을 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2000억달러 전략투자의 연간 자금조달 한도를 200억달러로 제한하는 등 대규모 달러 유출이 외환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줄이는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대미투자의 총액과 집행 속도를 동시에 관리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실제 프로젝트를 채워 넣는 과정에서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첫 투자사업으로 유력한 엔시날 가스복합발전소의 총사업비는 최초 검토 당시 168억달러에서 223억달러로 늘었다. 55억달러, 약 33% 증가한 규모다. 223억달러는 프로젝트 전체 사업비로 한국이 이를 전액 부담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첫 사업부터 예상보다 몸집이 커지면서 개별 사업의 수익성과 위험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
후속 사업의 규모는 더욱 크다. 미국 측은 2000억달러 전략투자 가운데 1200억달러를 활용해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건설하는 방안을 한국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시날 총사업비와 미국 측 원전 제안액을 단순 합산하면 1423억달러로 2000억달러 전략투자의 71%를 넘는다.
물론 원전 1200억달러 역시 미국 측 제안액으로 한국이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로 확정한 것은 아니다. 정부가 원전 8기 건설이라는 협력 방향과 구체적인 투자 규모를 분리해 협상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측은 이외에도 CCUS(탄소 포집·활용·저장), 알래스카 LNG 등 대형 에너지 사업에 한국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어 한정된 2000억달러를 놓고 투자 후보군은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5500억달러 투자 패키지의 실제 집행 단계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1·2차에 걸쳐 6개 프로젝트, 약 1090억달러 규모의 사업이 선정됐다.
1차로 오하이오 333억달러 규모 천연가스 발전시설과 텍사스 21억달러 원유수출 인프라, 조지아 6억달러 합성다이아몬드 생산시설 등 총 360억달러 규모 사업이 선정됐다. 이어 2차로 테네시·앨라배마에 최대 400억달러 규모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건설하고 펜실베이니아와 텍사스에 각각 최대 170억달러, 160억달러 규모 가스발전소를 짓는 사업도 발표했다.
두 차례 발표된 사업만 일본의 5500억달러 패키지 가운데 약 20%에 해당한다. 일본은 현재 3차 투자사업도 미국과 협의하고 있으며 AI와 반도체 관련 사업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만은 구조 자체가 다르다. 미국과 대만이 합의한 투자 틀은 대만 반도체·기술기업의 미국 신규 직접투자 최소 2500억달러와 대만 측의 신용보증 최소 2500억달러로 구성된다. 반도체·AI·에너지 기업의 직접투자를 애초 무역협상 패키지 안에 넣은 셈이다.
특히 TSMC의 미국 투자가 핵심이다. 대만과 미국이 합의할 당시 TSMC가 앞서 발표한 1000억달러 규모 추가 투자도 2500억달러 기업투자 약속에 포함됐다. 이후 TSMC의 미국 투자계획은 총 2650억달러까지 확대됐고 대만 정부는 TSMC를 제외한 다른 기업들도 미국에 200억달러를 추가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韓은 3500억달러 밖에 반도체 투자…‘마지노선’ 흔들리나
한국은 일본·대만과 상황이 다르다. 3500억달러라는 대규모 투자 약속을 이미 했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의 미국 직접투자는 이와 별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지 않는 기업에는 관세 부담을 지우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가며 현지 생산 확대를 압박하고 있다. 청와대도 미국 측이 반도체 투자 문제를 제기해 현재 한미 간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확인했다.
2000억달러 전략투자의 대상 산업에는 반도체도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자체적으로 미국 공장을 건설하거나 증설하는 직접투자는 3500억달러와 별개다. 미국의 요구에 대응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추가 증설을 결정하면 정부 간 합의액은 3500억달러 그대로여도 한국 경제 전체가 미국에 투입하는 자금은 그만큼 늘어난다.
이는 기업의 반도체 직접투자를 무역협상 패키지 안에 명시적으로 집어넣은 대만과 차이가 있다. 일본도 5500억달러라는 큰 틀 안에서 에너지·원전 사업을 확정하고 AI·반도체 후속 프로젝트를 협의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3500억달러를 약속한 상태에서 미국의 반도체 현지생산 요구가 별도 기업투자로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 사안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애초 민간기업이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려워 참여하지 않는 사업을 정부가 투자 대상으로 검토하면서도 ‘상업적 합리성’을 투자 원칙으로 내세운 것 자체에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며 “미국 시장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기업들도 필요한 현지 투자는 해야 하지만, 수익성보다 관세 감면이나 미국 측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가 계속 추가될 경우 당초 사업계획에 없던 자금까지 미국에 배정해야 해 기업의 투자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