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무한 호박’ 지다…韓도 열광한 日 작가 쿠사마 야요이 타계 (종합)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오현주 기자I 2026.08.27 15:09:16

Google 검색에서 이데일리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14일 도쿄서…뒤늦게 알려진 별세 소식
평생 시달린 환각고통 예술로 승화시켜
무한망·호박작가…현대미술계 거장으로
국내 미술시장에선 압도적 영향력 발휘
3월경매서 '호박' 105억 최고가 낙찰도

지난 14일 별세한 쿠사마 야요이. 대표적인 연작 ‘호박’을 변주한 회화·조각작품을 내놓은 자신의 스튜디오에 나와 앉았다. 쿠사마는 작품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옷차림을 즐겼는데 그 자체가 또 다른 전시가 되기도 했다. “호박의 야성적이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고 쿠사마는 말해왔다(사진=이데일리DB, 2010@YAYOI KUSAMA).
지난 14일 별세한 쿠사마 야요이. 대표적인 연작 ‘호박’을 변주한 회화·조각작품을 내놓은 자신의 스튜디오에 나와 앉았다. 쿠사마는 작품세계를 그대로 드러낸 옷차림을 즐겼는데 그 자체가 또 다른 전시가 되기도 했다. “호박의 야성적이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고 쿠사마는 말해왔다(사진=이데일리DB, 2010@YAYOI KUSAMA).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뉴욕에서 어느 날 무한한 망과 점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순간 내 붓이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넘어 식탁과 바닥, 방 전체를 망과 점으로 뒤덮기 시작했고 나의 손, 몸 등까지 퍼졌다. 아마 환각이었던 것 같다. 이 사건 이후 난 조각과 퍼포먼스의 길을 택했다. 내 작업의 방향 전환은 언제나 내적 상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다”(쿠사마 야요이 ‘자서전’에서).

편집증적 정신장애를 기어이 예술로 승화시켰던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1929∼2026)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14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숨졌는데 27일 쿠사마스튜디오가 뒤늦은 별세 소식을 전하며 알려졌다. 쿠사마스튜디오는 “쿠사마가 마지막 날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했다. 향년 97세다.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태어나 미국과 일본 등을 오가며 활동해온 쿠사마에게 붙는 수식은 대단히 화려하다. ‘땡땡이작가’ ‘호박작가’를 너머 ‘현대미술계 거장’이란 타이틀이 늘 따랐다. 한 시절을 풍미한 과거사에 묻히는 것을 거부하며 구순을 넘기고도 현역으로 활동해 ‘가장 비싼 생존작가’의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는 달리 단순치 않은 ‘스토리’가 그이를 따라다녔다. 유년시절부터 겪었다는 망상과 환각, 좀더 전문가적 진단으로는 ‘편집적 강박증, 공황장애’를 이겨내는 세월을 살아왔다는 거다.

2023년 9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 2023’ 중 데이비드 즈위너 부스에 나온 쿠사마 야요이의 조각작품 ‘호박’(2016). 거울로 광택을 낸 청동조각이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2023년 9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 2023’ 중 데이비드 즈위너 부스에 나온 쿠사마 야요이의 조각작품 ‘호박’(2016). 거울로 광택을 낸 청동조각이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평생 날 괴롭힌 트라우마”로 예술을 만든 작가

부유한 가정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쿠사마는 열 살 무렵부터 발작·착란증세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증세가 교육이 부족한 탓으로 아이를 닦달했고 이는 “평생 날 괴롭히는 트라우마”가 됐다. 그러다가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으로 번져나가는 경험을 하는데,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된 그 환영은 쿠사마의 인생을 바꿔놨다. 그 전부를 화면에 옮기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수많은 점들이 달려드는 환각은 계속됐고, 쿠사마는 일생을 걸고 고통으로 영감으로 모티프로 환각을 품어냈다.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뉴욕에서도, 1973년 일본으로 귀국한 이후까지도 달려드는 점들은 물방울과 무한그물 등의 작품에 바탕이 됐다.

1993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일본관 단독 대표로 참가한 뒤 글로벌하게 영역을 넓혀갔다. 2010년대 들어선 뉴욕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모던 등 유럽·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2017년에는 도쿄 신주쿠에 ‘쿠사마 야요이 미술관’을 개관하고 이곳을 기반으로 말년까지 신작을 발표해왔다.

작품가도 나날이 치솟았다. 2019년 미국 미술전문매체 아트넷은 쿠사마를 ‘ 2010년대 작품값이 가장 크게 상승한 작가’ 3위에 올려놨다.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당시 10위를 기록했으니 그 수위를 가늠할 수 있다. 세계 경매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은 2022년 필립스 뉴욕에서 거래한 ‘무제(그물)’(1959)다. ‘무한그물’(Infinity Nets) 연작 중 한 점으로 1050만달러(당시 약 133억원)에 낙찰됐다.

쿠사마 야요이의 ‘무제(그물)’(1959). 2022년 필립스 뉴욕에서 1050만달러(당시 약 133억원)에 낙찰됐다. ‘무한그물’(Infinity Nets) 연작 중 한 점으로 세계 경매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이다(사진=필립스옥션).
쿠사마 야요이의 ‘무제(그물)’(1959). 2022년 필립스 뉴욕에서 1050만달러(당시 약 133억원)에 낙찰됐다. ‘무한그물’(Infinity Nets) 연작 중 한 점으로 세계 경매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이다(사진=필립스옥션).
올해 3월 국내 경매서 ‘호박’ 105억원에 낙찰

먼 나라 얘기만도 아니다. 유독 한국 컬렉터가 열광한 일본 작가로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가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원화든 판화든 조각이든 매회 미술품 경매에서 빠지지 않을 만큼 쿠사마의 작품은 줄기차게 출품되고 사고팔렸다.

그중 올해 3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팔린 ‘호박(MBOK)’(2015)이 작가 최고가를 찍었다. 104억 5000만원에 낙찰되며 국내 역대 낙찰가 2위 작품이자 한국 경매시장에서 거래된 쿠사마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비싼 그림이 됐다. 비단 단일작품만도 아니다. 2022년에는 국내 경매시장 전체에서는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작가(합산 금액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해 거래된 쿠사마 작품의 낙찰총액은 276억여원으로 김환기·이우환 등 국내 거물 작가들까지 제쳤다.

올해 3월 서울옥션 ‘컨템포러리 아트 세일’에서 104억 5000만원에 팔려나간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MBOK)’(2015, 130×160㎝). 100억원대를 돌파하며 한국 경매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쿠사마의 작품인 동시에 국내 역대 낙찰가 2위 작품이 됐다(사진=서울옥션).
올해 3월 서울옥션 ‘컨템포러리 아트 세일’에서 104억 5000만원에 팔려나간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MBOK)’(2015, 130×160㎝). 100억원대를 돌파하며 한국 경매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쿠사마의 작품인 동시에 국내 역대 낙찰가 2위 작품이 됐다(사진=서울옥션).
“해가 히가시야마산 위로 떠오르면 나는 호박과 마주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오롯이 나의 마음에 집중한다. 달마가 돌벽을 마주하고 십 년을 보냈던 것처럼 나는 호박을 마주하고 시간을 보낸다.” 끊임없이 반복하고 집적하고 증식하고 확산하며 자신의 편집증을 예술작업에 연결했다. 그렇게 무한능력을 발휘했던 쿠사마가 이제 떠났다.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