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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파 라디오 모니터링 그룹이 ‘V32’로 이름 붙인 이 방송국은 25년 만에 이란어로 확인된 첫 번째 숫자 방송국이다. 현재 이란 시간 기준 오전 5시 30분과 오후 9시 30분, 하루 두 차례 약 1시간 30분씩 정기 송출되고 있다.
전직 중앙정보국(CIA) 모스크바 지부장 존 사이퍼는 “이란 내 정보 자산과 연락을 끊지 않기 위한 백업 통신 수단일 가능성이 높다”며 “전쟁 상황에서는 완벽한 대안 수단”이라고 말했다. CIA 비밀 훈련 프로그램의 수석 교관이기도 했던 그는 “인터넷이 끊기거나 전화 서비스가 차단돼도 정보 자산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란 정부는 전쟁 발발 직후 외부와의 인터넷 연결을 대폭 차단했다. 이란은 이전 위기 때도 같은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방송 시작 수일 만에 전자음 폭격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이란의 전파 재밍(교란) 시도로 분석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곧 새 주파수로 이동해 숫자 읽기를 재개했다.
쿠바 첩보원의 숫자 방송국 수신 사례를 수년간 추적한 전직 미국 방첩관 크리스 시먼스는 “전쟁이 시작된 날 방송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숫자 방송국은 정보기관이 단파 전파를 이용해 공작원에게 암호화된 일방향 지령을 보내는 방식이다. 공작원은 라디오와 ‘일회용 암호표(one-time pad)’라 불리는 수첩으로 숫자를 해독한다. 수첩은 즉시 소각할 수 있고, 라디오 다이얼은 수 초 안에 돌릴 수 있어 은폐가 용이하다.
시먼스는 “목숨을 걸고 있는 공작원에게는 가장 단순하고 은닉 가능하며 나중에 설명하기도 쉬운 도구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라디오를 갖고 있고 주변에도 알려져 있다면 왜 스파이로 의심받겠느냐”며 “대놓고 숨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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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는 미국 대사관이 없어 가장 어려운 공작 환경으로 꼽히는 이란 내 정보망 유지에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퍼는 “이란이나 북한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다”며 “효과가 검증된 구식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전직 CIA 리마·로마 지부장 로버트 고렐릭은 이란 반체제 세력이 운영하는 것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아울러 V32가 실제 교신 수단이 아닌 심리전 도구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방송 자체가 이란 방첩기관으로 하여금 “내부에 미국·이스라엘 스파이가 있다”는 의심과 혼란을 심어주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고렐릭은 “이란 방첩기관에 압박을 더하기 위한 것이라면, 랭글리(CIA 본부)에서 제안을 받았을 때 ‘해보자’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숫자 방송국은 냉전 종식 이후 줄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폴란드, 러시아, 대만, 북한이 정기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만이 운영하는 V13 방송국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수신되며, 플루트 선율로 청취자를 맞이하고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끝맺는 것으로 유명하다.
룬드대학교 방첩 전문가 토니 잉에손은 “냉전 때부터 쓰던 구식 통신 기술이 지금도 여전히 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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