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野 단독 감액안, 국회 통과…4조 깎인 ‘673.3조’, 경기대응 충분할까

김미영 기자I 2024.12.10 18:22:27

국회, 10일 본회의서 내년 예산안 처리
野, 정부안서 4.1조 감액한 수정안 밀어붙여
정부, ‘지역화폐’ 막판 협상카드 내밀었지만 불발
예비비, 절반 싹뚝…민생 예산도 깎여
대내외 불확실성 고조에 대응 여력 ‘한계’

[세종=이데일리 김미영 기자] 내년도 예산안이 사상 초유로 야당의 감액안으로 처리되며 ‘경기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재정이 정부의 애초 계획보다 더 쪼그라들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으로 한국 경제 위기가 고조하는 상황에서 예산안이 정치적 문제로 졸속처리됐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 野 “집행률 저조” 예비비 삭감…정부 여당 반발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주도로 통과된 내년도 예산안은 총 673조 3000억원이다. 지난달 29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민주당이 정부안(677조 4000억원)에서 4조 1000억원을 삭감한 감액안 그대로 처리됐다. 올해 예산보다 2.5% 늘은 규모다.

총수입은 정부안에서 2000억원가량 줄은 651조 6000억원으로 조정돼 올해보다 6.4% 증가했다. 실질적인 나라살림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인 관리재정수지 적자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9%(정부안)에서 2.8%(국회 통과안)로 소폭 축소됐다. 국가채무 규모도 정부안보다 3조 7000억원 줄어 GDP 대비 48.1%로 감소했다.

주요하게 삭감된 항목은 예비비다. 정부 예산안 4조 8000억원 중 절반인 2조 4000억원을 깎았다. 예비비란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거나 국회가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지출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하는 예산이다.

민주당은 코로나19 이전에 예비비가 3조원 수준이었단 점과 최근 2년간 집행률이 낮단 점을 삭감 이유로 들었다. 2023년도 예비비 집행액은 1조 3000억원(집행률 29%), 올해 집행액은 10월 말 기준 6000억원(집행률 14.3%)이다.

실제로도 기재부가 편성한 내년 예비비는 전년에 비해 14.3% 늘어 총지출 증가율(3.2%)보다 높았다. 미국의 대선 결과에 따른 격변 상황을 고려한 편성이었단 게 정부의 입장이다. 이에 정부·여당은 예비비 삭감으로 재난·재해·감염병 발생이나 트럼프 정부 출범에 따른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 발표했던 이른바 ‘대왕고래 프로젝트’, 동해 심해가스전 탐사시추를 위한 예산은 정부안 505억 5700만원 가운데 8억 3700만원만 편성됐다. 497억원가량이 증발해 사실상 전액 삭감으로, 사업은 좌초 위기에 몰렸다. 이와 함께 야당은 대통령실을 비롯해 검·경찰과 감사원의 특수활동비, 특정업무경비 등도 전액을 도려냈다.

정부가 의료개혁 반발을 잠재우려 ‘당근책’으로 내놨던 전공의 지원예산도 931억 1200만원 삭감한 2747억 400만원으로 통과했다. 전공의 수련환경의 혁신지원, 전공의 등 수련수당 지급 등의 예산이 깎였다. 이외에도 △혁신성장펀드·원전산업성장펀드 등 기술개발(R&D)815억원 △돌봄수당(384억 원)△청년도약계좌 280억원 △대학생 근로장학금 83억원 등 산업·민생예산이 감액됐다.

◇“경기 대응할 재정 여력 줄어…잘못된 결정”

(사진=노진환 기자)
정부는 예산 편성권을, 국회는 심의권을 가진다. 국회는 감액은 할 수 있지만 정부 동의 없인 증액은 할 수 없다.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정부와의 증액 협상을 포기하고 감액안을 밀어붙인 배경이다.

정부는 예결위 심의 단계에서부터 야당의 단독 감액안 처리에 강력 반발해 왔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두 차례 대국민 브리핑을 통해 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으로 탄핵정국까지 치닫자 정부 여당의 대야(對野) 협상력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기재부는 이날 오후 급하게 야당에 “예결위에서 삭감한 4조 1000억원 중 예비비 1조 8000억원 등 2조 1000억원을 복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간판정책인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을 위한 예산 4000억원, 고교무상교육 국고지원예산 3000억원을 반영하겠단 협상카드도 내밀었지만, 막판 극적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당 출신인 우원식 국회의장은 예산안 처리 후에 고개를 숙였다. 우 의장은 “예산안 협상은 본래 불요불급한 예산을 먼저 삭감하고 그렇게 만든 여유공간에서 다시 필요한 예산을 증액하는 것이나, 이러한 절차가 막히면서 감액안 상태의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하게 돼 국민께 송구하다”고 말했다.

예비비를 포함, 내년 예산안 규모가 정부안보다 줄어들면서 대내외 불확실성 고조 속에 얼어붙고 있는 내수 대응 여력이 축소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야당은 내년에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하겠단 입장이지만 당장 위기에 대처하기엔 한계가 있단 지적도 잇따른다.

특히 내년 1월20일(현지시간)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하고 관세전쟁이 현실화할 우려가 높은 상황에서 재정이 제 역할을 못하리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한국은행·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주요 기관은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줄줄이 낮추는 등 경기 악화 전망만 우세해지고 있다.

정부 한 관계자는 “경기 상황이 녹록지 않게 돌아가고 있어 내수부양을 위해 재정운용 기조를 확장으로 옮겨야 할 타이밍이었다”며 “정치상황이 급변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감액안이 그대로 통과돼 재정 대응 입지가 좁아졌다”고 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은 윤석열 정부가 붕괴한 상황이라 증액을 포함한 정부와 국회간 예산 협상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고 짚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야당이 정국을 이유로 잘못된, 정치적인 결정을 한 것”이라며 “추경은 차치하고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긴축재정’ 예산안보다 더 조여진단 잘못된 신호를 국민에게 줄 수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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