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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이재명 대통령을 기억하는 성남시 상대원동 시장 상인들은 그를 “머리 좋고 똑똑한 효자 아들”로 회상한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어머니 일을 도왔고, 그 짧은 시간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 시절의 가난했던 삶을 상징하는 두 가지 암울한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에서 프레스기에 왼쪽 손목이 눌리는 사고였다. 이 사고로 평생 장애를 안게 된 그는 지금도 왼손을 제대로 펴지 못한다. 두 번째는 자살을 결심했던 일이다. 수면제를 모아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이를 눈치챈 약사가 소화제를 대신 건네며 그의 생명을 구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소년 이재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공부에 매진했다. 이런 이유로 그를 두고 “독하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인권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그는 성남시 일대를 돌며 시민운동에 힘썼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소외된 이웃을 돕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 취임 선서 직후, 가장 먼저 국회 청소노동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2023년, 그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시절 단식을 할 때 묵묵히 곁을 지켰던 이들이다.
그가 정치권 입문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과 맞물려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금권정치를 해소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돈 안 드는 선거’가 가능해지면서 이재명 대통령도 정치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가 처음 도전한 선거는 2006년 성남시장 선거였다. 경험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며 완패했고, 2007년에는 정동영 당시 대선후보 캠프에 합류했다. 이듬해인 2008년 성남 분당갑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했다.
두 번의 낙선 이후에도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며 기회를 기다린 그는 2010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됐다. 시장이 된 그는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드러냈고, 재임 8년 동안 성남시의 6,642억 원에 달하던 부채를 모두 해소했다. 평균 95% 이상의 공약 이행률을 기록했고, 성남시의료원을 설립해 시민들의 의료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이 같은 활동은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그는 트위터 등을 통해 시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고, 이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시절까지 이어지며 두터운 지지층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정치인 이재명’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7년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통령 후보 경선이었다. 중앙정치 경험이 없었음에도 그는 문재인 전 대통령,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비록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당 내 차세대 주자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18년 경기지사로 당선되면서 그의 정치 인생은 전환점을 맞는다. 재난지원금 지급, 도내 계곡의 불법 시설물 철거 등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고,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도 확보했다.
그러나 탄탄대로 같던 정치 여정은 2021년부터 시련을 맞는다. 이낙연 새미래민주당 상임고문과의 치열한 경선 끝에 승리했지만, 2022년 대선에서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0.73%포인트 차로 패배했다. 이후 각종 의혹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고, 단식과 흉기 피습 등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도 반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치러진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그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시도하자 이를 앞장서 저지했고, 결국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이후 2025년 6월 3일 조기 대선에서 승리하며 대한민국 제2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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