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순환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분리선 하나를 보아야 합니다. 목표를 정하는 사람과 실제로 돈을 굴리는 사람은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달라야 합니다.
“이사님, 우리 회사 퇴직연금 수익률 좀 올리려면 삼성전자를 더 사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지, 김 부장. 요즘은 채권 금리가 좋으니 채권 비중을 높여야지.”
한국의 어느 기업 퇴직연금 회의에서 오갈 법한 대화입니다. 비전문가인 임원과 부장이 모여서 수백억 원의 자산 배분을 논의합니다. 나름대로 회사를 위해 고민하고 있지만, 냉혹한 금융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기에는 전문성도 시간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것이 한국형 제도의 약점입니다. 돈을 모으는 주체가 돈을 굴리는 역할까지 떠안거나, 반대로 전문성이 없다는 이유로 금융기관에 모든 걸 맡겨버리고 방관합니다. 어느 쪽이든 거버넌스의 순환은 약해집니다. 주인은 목표와 위험한도를 정해야 하지만, 매매 버튼까지 직접 누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지만, 맡긴 뒤 사라져서도 안 됩니다. 이 원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곳이 바로 캐나다입니다.
1997년 캐나다, “정부는 손을 떼라”
1990년대 중반, 캐나다 국민연금은 지속 가능성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제도가 처음 도입된 1966년에는 부양 구조가 훨씬 젊었고, 임금과 노동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구 구조가 바뀌고 비용이 커졌습니다. 1993년 전망은 이대로 부과방식에 가까운 구조를 계속 유지하면 2015년경 준비금이 고갈되고, 2030년에는 보험료율이 14.2%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미루는 방식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재정 구조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CPP 자산은 상당 부분 정부와 주정부의 재정 운용 안에 묶여 있었습니다. 연금 자산은 가입자의 노후를 위해 가장 잘 굴려져야 할 돈인데, 정치와 재정의 필요가 그 돈의 운용 논리를 흐릴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가 선택한 해법은 보험료율을 조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돈을 걷고 제도를 책임지는 기능과, 그 돈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기능을 제도적으로 떼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1997년 설립된 CPPIB, 지금의 CPP Investments가 그 결과물입니다. 당시 재무장관 폴 마틴은 훗날 이 개혁의 핵심을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 정부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전문가 조직이 오직 가입자의 장기 이익만을 바라보며 독립적으로 운용하도록 보장하는 원칙)‘으로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CPPIB는 법률상 별도 법인으로 설립되었고, 정부의 대리인도 아니며, 임직원도 연방 공무원이 아닙니다. 정부와 의회에 설명할 책임은 있지만, 투자정책과 개별 투자 결정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사회도 정치적 대표자를 모아 놓은 기구가 아닙니다. 법은 이사회를 12인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재무장관이 이사를 추천할 때 금융 능력이나 관련 경험을 갖춘 인물이 충분히 포함되도록 요구합니다. 법으로 정한 목표도 분명합니다. CPP의 기여자와 수급자의 이익을 위해 자산을 관리하고, CPP의 재정 여건을 고려하면서 과도한 손실 위험 없이 최대 수익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역 개발, 단기 경기 부양, 선거용 투자 같은 목표가 끼어들기 어렵게 만든 구조입니다.
여기에 더해 CPPIB는 시간이 지나며 또 하나의 선택을 했습니다. 자산 규모가 커지자 모든 것을 외부 운용사에 맡기는 대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보상과 조직 체계를 갖추고 전문가를 직접 채용했습니다. 수수료로 빠져나갈 수 있는 돈을 줄이고, 장기투자 역량을 기금 내부에 축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내부화한 것이 아니라, 규모와 역량이 커지면서 위탁과 내부 운용의 조합을 고도화한 것입니다. 조성은 공적 제도의 책임으로 남겨두되, 운용은 정치가 아니라 전문성의 영역으로 옮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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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로부터 읽어야 할 것은 “캐나다식 공적 기금을 그대로 만들자”가 아닙니다. 핵심은 거버넌스와 매니지먼트의 분리입니다.
첫째, 주인은 목적을 정합니다. 누가 주인인지는 제도마다 다릅니다. 네덜란드 산업별 기금에서는 노사와 가입자 대표가 그 역할을 맡습니다. 캐나다 CPP에서는 법과 정부, 그리고 국민 전체의 위임을 받은 독립 이사회가 그 역할을 맡습니다. 한국형 퇴직연금 기금에서는 수탁법인의 이사회와 그 안의 위원회가 이 역할을 맡게 될 수 있습니다. 형태는 달라도 질문은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수익이 필요한가.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내할 것인가. 누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둘 것인가.
둘째, 전문 조직은 위임받은 범위 안에서 실제 운용을 합니다. 주식이 싼지 비싼지, 환율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지, 대체투자를 얼마나 담을지, 어떤 운용사를 쓰고 어떤 운용사를 교체할지는 전문성과 시스템이 필요한 일입니다.
셋째, 주인은 운용 결과를 평가하고 위임을 갱신합니다. 목표를 정하는 일, 운용하는 일, 평가하는 일이 서로 구분되어야 거버넌스의 순환이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운용의 독립은 “전문가에게 백지위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독립은 감독의 포기가 아니라 간섭의 절제입니다. 주인이 선수의 역할까지 빼앗지 않되, 선수에게 맡긴 뒤 결과를 묻는 구조입니다.
한국의 현실 — 선수도, 심판도 없는 그라운드
이제 한국을 돌아봅시다. 한국은 여전히 조성과 운용이 뒤섞여 있습니다. 기업 담당자가 본업을 하면서 틈틈이 펀드를 고르거나, 반대로 금융기관에게 알아서 해달라고 맡긴 뒤 방치합니다. 전자는 아마추어 운용이고, 후자는 이해상충이 있는 상대에게 감독 없는 위임을 하는 구조입니다. 전문적인 운용 조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니, 책임 소재도 불분명합니다. 수익률이 나빠지면 기업은 금융기관 탓을 하고, 금융기관은 시장 탓을 합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조성과 운용이 뒤섞인 이 지점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한국형 기금의 현실적인 첫걸음 — ’수탁법인‘과 위탁 운용
제도 확대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형 퇴직연금 기금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돈을 모으는 그릇만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논의되고 있는 방향은 ’수탁법인‘이라는 별도의 독립 법인을 세워 기금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이 수탁법인의 이사회가 바로 주인의 역할, 즉 거버넌스를 담당합니다.
다만 캐나다의 CPPIB처럼 처음부터 내부에 전문 운용 조직을 직접 꾸리는 것은 한국의 현실에는 아직 이릅니다. 이제 막 첫발을 떼는 기금이 대규모 내부 조직을 갖추려면 만만찮은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을 감당할 만큼의 규모와 수익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경로는 위탁입니다. 수탁법인의 이사회는 직접 투자를 결정하는 대신, 검증된 외부 전문 운용기관에 운용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를 **OCIO(Outsourced CIO, 최고투자책임자(CIO)의 자산운용 역할을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하되 수탁법인 이사회가 그 성과를 평가·감독하는 구조)**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이사회의 투자 전문성을 보완하고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지키기 위한 별도의 기금운용위원회를 둘 수 있습니다. 이사회가 큰 방향을 정하고, 기금운용위원회가 그 방향 안에서 전문성을 더하고, OCIO가 실제로 자금을 굴리는 3단 구조인 셈입니다.
이 구조가 자리 잡고 규모가 충분히 커진다면, 그때 캐나다처럼 내부 조직을 직접 꾸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푸른씨앗이나 미래에 등장할 금융기관개방형 기금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조성은 연대해서 크게, 운용은 검증된 전문가에게 전문적으로 맡기되, 그 위임을 다시 평가하는 장치를 두어야 합니다. 이 원칙이 지켜질 때, 우리의 퇴직연금은 정치적 외풍이나 비전문가의 오판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가입자의 노후를 위해 굴러가는 독립된 자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네덜란드의 산업별 기금, 암박츠히어가 연 거버넌스 품질 논의, 캐나다의 조성과 운용 분리는 모두 기금형 조직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계약형이 주류인 한국에서는, 애초에 거버넌스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일까요? 다음 장에서는 기금형이 아니어도 거버넌스를 측정하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한국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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