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씻김-무악과 만나는 몸의 자전’ 박은하·김순정·홍은주·김영은 무대 올라 꽹과리 울리자 객석도 들썩…무대·객석 하나 된 굿판 “우리는 무엇을 풀고 갈까”…묵직한 울림 남겨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종이 울리고 시나위 그룹 ‘신청악회’가 무악(巫樂·무당이 굿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무대에 등장했다. 연출가 진옥섭이 무대에 올라 관객에게 절을 올린 뒤 무용수 김영은을 불러내면서 본격적인 공연의 막이 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김영은은 무언가를 빌듯 두 손을 비비고 몸에 붙은 것을 털어내다가, 바닥을 손으로 쓸어내며 무대를 누볐다.
무용수 김영은(사진=시댄스).
16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선보인 ‘씻김-무악과 만나는 몸의 자전’은 진도 씻김굿을 모티브로, 네 명의 춤꾼이 자신만의 몸짓으로 의례를 펼치며 몸에 쌓인 시간과 감정을 ‘움직임의 고해성사’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진도 씻김굿은 망자의 한을 풀고 넋을 깨끗이 씻겨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한 의례다. 맺힌 한을 풀어주는 ‘고풀이’, 망자를 깨끗이 씻기는 ‘씻김’, 넋을 올리는 ‘넋올리기’, 망자가 편히 떠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길닦음’ 등의 절차가 이어진다. 이날 무대에서 네 명의 무용수는 각자의 춤으로 ‘씻김’을 풀어냈다. 누군가는 쓸고, 누군가는 털고, 누군가는 맺힌 것을 풀었다. 망자를 위한 오래된 의례는 서로 다른 춤을 만나 오늘의 ‘씻김’으로 무대 위에 펼쳐졌다.
무대 한쪽에서는 ‘신청악회’가 굿판의 소리와 장단을 만들어냈다. 이소영(무당), 손세영(가야금), 윤진우(대금), 천선우(해금), 김소리(아쟁)가 무용수와 호흡을 주고받았다. 춤과 무악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무대는 조금씩 굿판으로 변해갔다.
김영은에 이어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이는 국가무형유산 승무 이수자 홍은주였다. 붉은 고깔에 흰 한복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긴 수건을 손에 들고, 빠르게 몰아치는 장단을 악사들과 주고받으며 흥겹게 몸을 풀었다. “썩은 감정 모두 털어버리고. 이제 슬슬 몸이 풀어지는구나. 얼쑤!”라는 추임새가 더해지면서 춤은 한층 빨라졌다. “지친 마음 하나씩 내려놓으시라”는 축원은 무대를 넘어 객석으로 향했다.
무용수 홍은주(사진=시댄스).
세 번째 무대는 김순정발레단 대표이자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특임교수인 김순정이 맡았다. 동아무용콩쿠르 전체 대상을 받고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한 그는 이날 씻김굿의 ‘고풀이’를 표현했다. 고풀이는 망자의 한과 응어리를 상징하는 매듭을 하나씩 풀어 생전에 맺힌 것을 풀어주는 의례다.
평생 발레로 몸을 다져온 김순정은 이날 보랏빛 한복 두루마기를 걸치고 무대에 올랐다. 토슈즈 대신 무악의 장단을 탄 그의 춤에는 발레 특유의 유려한 선과 한국 춤의 몸짓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장단에 몸을 맡긴 그는 맺힌 것을 하나하나 풀어내듯 겹겹이 몸을 감싸고 있던 보랏빛 두루마기를 차례로 벗어냈다.
무용수 김순정(사진=시댄스).
마지막 무대에 박은하가 꽹과리를 들고 등장하면서 무대는 흥겨운 굿판으로 바뀌었다. 박은하는 국내 최초의 여성 사물놀이 연주자로 1984년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창단 멤버로 합류한 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악장을 지냈다. 국가무형유산 남사당놀이 이수자로 설장구와 쇠춤을 자신만의 신체예술로 확장해온 예술가다.
박은하가 꽹과리를 치며 빙글빙글 돌자 객석에선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객석으로 내려온 박은하의 움직임에 관객들은 손을 들고 장단을 타며 호응했다. 이어 신청악회 쪽으로 다가간 그는 꽹과리를 치며 악사들과 장단을 주고받았다.
이번 공연에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 사물놀이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네 사람의 몸이 무악과 만났다는 점이다. 같은 장단 위에서도 몸이 기억하는 삶은 달랐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시간은 무악을 만나 저마다의 춤이 됐고, 네 사람의 몸은 각자의 ‘자전’을 써 내려갔다.
마지막 장단이 멎어도 ‘씻김’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을 풀어내고, 어떤 마음을 품은 채 살아갈 것인가. 망자를 잘 보내기 위해 시작된 오래된 의식은 산 자에게 ‘잘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비워내야 하는가’를 묻는 춤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