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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에 조예가 깊으신 아버님께서는 어릴 적부터 “남자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라고 두 형제를 가르쳤다. 하지만 또 말씀을 어기고 말았다.
지난 8월 17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넵스마스터피스 2라운드가 한창이던 오후, 평소 친분이 있는 정재은 선수(23·KB금융그룹)를 우연히 만났다.
“요즘 성적이 좋지 않은 거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기자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캐디’를 해주겠다는 말을 했고, 정재은은 무슨 믿음이었는지 단박에 ‘OK’를 했다.
결전의 현장은 9월 21일부터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골프장에서 열린 KDB대우증권 클래식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기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3일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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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골프도 좀 치고, 라이(공이 놓인 상황)도 잘 보니 걱정하지 마세요.” ‘믿음’을 주기 위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백만 잘 메고 다니세요. 다른 건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정재은의 간결하고 무게감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주니어 시절부터 딸의 캐디를 도맡아 했다는 부친 정홍렬 씨(55)는 백을 놓는 위치, 핀을 뽑는 방법, 음식을 챙겨주는 것 등 캐디의 역할을 세세하게 가르쳐줬다. “선수의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합니다.” 정 씨는 10분여의 교육을 마치면서 가장 중요한 캐디의 덕목을 일러줬다.
1989년생으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정재은은 주니어 시절에는 대적할 선수가 없을 정도로 강자였다.
하지만 프로 무대는 달랐다. 2007년 프로 전향 후 아직 우승을 신고하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그를 일컬어 “주니어 시절부터 주목받던 선수들은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정재은만 남았다. 미모까지 갖춰 대형 스타 가능성도 크다”고 평가했다.
대회 1라운드. 짙은 안개로 경기가 지연됐다. 초보 캐디라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더욱 긴장이 됐다. 게다가 전날 밤잠을 설친 탓에 피로도 몰려왔다.
떨림으로 시작된 10번홀을 보기로 출발했다. ‘선수가 불안한가?’라는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 순간 “색다른 경험이네요. 맘이 편해 잘 될 것 같아요”라고 위로해준다. 역시 프로는 프로다.
세 홀을 돌고 나서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경험을 했다. 20kg이 넘는 백을 메고 산에 조성된 골프장을 뛰어다니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내색은 금물이다. 선수가 눈치를 채면 샷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프로 대회에서는 핀을 뽑는 데도 규칙이 있다. 먼저 홀컵에서 가장 먼 선수의 캐디가 핀을 뽑는다. 이어 자기 선수가 홀 아웃을 하면 홀컵에 가장 가까운 선수, 즉 마지막으로 퍼팅하게 되는 선수의 캐디에게 핀을 넘긴다. 물론 실수를 해도 벌타는 없다. 하지만 경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다.
정재은은 첫날 경기를 3오버파 75타, 공동 72위로 마쳤다. 다음날 공동 60위에 들지 못하면 예선탈락이다. 맘이 편치 않았고, 미안했다. 모든 게 캐디 때문일 거라 자책했다. 정재은은 “오늘 핀 잘 뽑으셨고, 전체적으로 실수는 없었어요”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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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둘째 날, 먼저 선수 컨디션을 확인했다. “잠도 푹 자고 아주 가뿐해요”라면서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연습 그린에서 퍼팅을 하던 선수들이 한마디씩 한다. “힘들지 않아요?” “도망갔을 줄 알았다” “오늘은 잘하셔야 될 텐데” 등의 말로 초보 캐디를 압박한다. 한 선수는 “재은이만 예뻐하는 나쁜 기자”라며 애교 섞인 항의도 했다.
들리지 않는다. 강철 체력은 하루 만에 소진됐고, 어깨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골반 뼈는 왜 아프지?’라는 궁금증도 생겼다. 그래도 마음은 전날보다 편했다. 나름 훌륭한 데뷔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안개 때문에 8번홀에서 출발했다. 아이언 샷이 홀컵 40cm에 붙었다. “나이스 버디”라는 초보 캐디의 힘찬 외침에 선수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밝게 웃었다.
12번홀에서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내리막 아니죠?” 캐디 미팅 때 “백만 메고 다니세요”라고 힘주어 말했던 정재은이 조언을 구한 것이다. “살짝 오르막이네.”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록 버디를 놓쳤지만 선수에게 믿음이 생겼다는 사실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13번홀과 15번홀에서 샷 난조로 2타를 잃었다. 타수를 줄이지 못하면 예선 통과가 어렵다. 선수도 지쳐 보인다. “아직 10개 홀이 남아 있다.” 용기를 주려 노력했지만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다.
“우리 딸이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완벽하게 추는데 놀랍지 않아?” 세 살배기 딸 얘기로 선수의 주위를 돌렸다. “그래요? 신기하다.” 정재은은 애써 미소를 짓는다. 스스로 경기가 아닌 다른 생각을 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결과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다. 샷이 살아났고 퍼팅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남은 10개 홀에서 보기 없이 3개의 버디를 잡아냈다. 그리고 공동 44위라는 성적표로 본선에 당당히 진출했다.
“발걸음이 가벼워지셨네요?” 정재은이 밝아졌다. 그렇다. 캐디도 선수의 성적에 따라 힘이 생기는 것이다. 역시 ‘긍정의 힘’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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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화창한 날씨다. 전날 밤엔 홍삼으로, 아침에는 없던 힘을 만들어 준다고 수험생들과 운전자들에게 인기인 음료수로 몸을 다스렸다.
“캐디도 도핑 테스트에 걸려요.” 얘기를 들은 정재은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인가’라고 걱정하자 이내 농담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긴장을 풀어서인지 출발이 좋다. 10번홀 티 샷이 페어웨이에 예쁘게 안착했다. 그리고 3번 우드로 공략한 두 번째 샷은 그린에 보기 좋게 올라갔다. 5m 버디 퍼트. 깔끔하게 성공했다. 이틀 연속 보기를 범했던 홀이라 선수도 초보 캐디도 두 배로 즐거웠다.
“캐디 잘하시네요.” 이틀 동안 칭찬에 인색했던 정재은이 말했다. 자신의 실력을 캐디의 공으로 돌리려는 모습을 보니 역시 프로는 프로다.
“벙커는 확실하게 정리해야 해요.” 18번홀 버디 추가로 전반에만 2타를 줄인 정재은이 벙커에 대한 주의사항을 일러줬다. 되짚어보니 벙커 정리에 소홀했던 것 같았다.
프로 대회에서는 벙커를 완벽하게 복구하지 않으면 벌금 등의 제재가 따른다. 다른 선수들의 경기에 영향을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벙커 정리에 무관심한 아마추어 골퍼들도 생각해 볼 문제다.
전반에 2타를 줄이니 내 것이 아니었던 어깨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후반만 잘 마무리하면 된다.
초보 캐디와 선수의 흥겨운 입담도 계속됐다. ‘묵찌빠 잘하는 법’을 전수하자 정재은은 ‘최악의 캐디 유형’을 털어놨다. 역시 정답은 ‘선수에게 부담 주는 캐디’였다.
캐디 얘기가 나오자 기자의 캐디 점수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정재은은 “내 점수는 80점이에요”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높은 점수다. “왜 100점이 아니지?”라고 묻자 “20점은 내가 부족해서요”라는 속 깊은 답변이 돌아왔다.
80점이라. 솔직히 50점도 안되겠지만 캐디를 배려하려는 마음씨가 예쁘다. 골반 뼈 통증도 신기하게 사라졌다.
후반 9개홀에서 타수를 줄이지 못한 정재은은 전날 공동 44위에서 12계단 상승한 공동 32위로 대회를 마쳤다. 최근 5개 대회 중 최고 성적이다.
“다음 대회도 해주시면 안 돼요?” 처음 기자가 제안했던 것과 반대 상황이다. 순간 ‘OK’를 할 뻔했다. 하지만 발바닥에 생긴 6개의 물집이 마음을 잡아줬다. 그렇게 기자의 캐디 데뷔전도 끝이 났다.
쉽지 않은 기회를 준 정재은 선수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전국의 수많은 캐디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