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中)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 집회현장. 이곳에서는 민중가요 대신 블랙핑크 로제의 신곡 ‘아파트’가 울려 퍼졌다. 집회에 참여한 20~30대 젊은 세대들은 로제의 ‘아파트’를 다 함께 부르며 한목소리를 냈다. 촛불 대신 아이돌 응원봉을 든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그룹 NCT, 에스파, 뉴진스, 빅뱅, 아이유, 비투비, 샤이니, 인피니트 등 다양한 팬덤을 상징하는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한자리에 모여 촛불집회 현장을 다채롭게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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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문화가 달라졌다.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의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그로인한 집회참여 방식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집회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플레이리스트다. 과거엔 투쟁적인 성격이 짙은 민중가요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 열리는 집회 현장에서는 K팝 아이돌의 노래가 흘러나와 눈길을 끈다.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에스파의 ‘위플래시’, 세븐틴 유닛 부석순의 ‘파이팅 해야지!’, god의 ‘촛불하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떼창 파트가 많거나,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노랫말이 담겼다는 점이다.
특히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의 경우 2016년 이화여대 학내 시위 현장, 2020년 태국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져 주목받은 바 있다. ‘다시 만난 세계’의 노랫말 중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등이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준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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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을 들고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20대 여성 이모 씨는 “TV에서 응원봉을 들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응원봉을 챙겨 나와 여의도로 향했다”며 “나만의 방식으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다른 촛불집회 참가자 20대 여성 박모 씨는 “예전엔 집회라고 하면 무조건 위험하고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만 인식됐다”며 “응원봉을 들고 콘서트장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나오기에도 안성맞춤”이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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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도 한국의 집회문화를 주목하고 있다. 집회가 K팝 콘서트를 떠올리게 하고 파티를 연상케한다는 등 인상 깊은 평까지 나올 정도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7일(현지시간) “국회 밖에서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며 윤 대통령의 퇴진을 밤늦게까지 요구했다”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지만 군중은 K팝에 맞춰 노래하고 형광색 응원봉을 흔들며 시위했다”고 보도했다. AFP통신도 “집회 현장에서 에스파의 ‘위플래시’ 등이 흘러 나왔다”며 “참가자들이 K팝을 들으며 즐겁게 뛰고, 응원봉과 LED 촛불을 흔드는 등 댄스파티를 연상케 했다”고 현장 상황을 보도해 눈길을 끈다.
K팝 가수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내기보단, 집회에 참여한 팬들에게 건강을 당부하는 방식으로 응원을 전하고 있다.
샤이니 온유는 팬 커뮤니티를 통해 “너무 춥지 않게 따뜻하게 입고 핫팩도 꼭 챙겼으면 좋겠다”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제로베이스원 박건욱도 “다치지 말고 핫팩 주머니에 꼭 넣고 다니라”면서 “잔소리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니까”라는 말로 애틋한 팬사랑을 전했다. 루셈블 출신 올리비아 혜는 “오늘 여의도 가는 크루들 정말 멋지고 대단하다”며 “누군가는 내가 의견을 밝히는 게 불편할 수 있겠지만 아이돌이기 전에 국민이기 때문에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